반도체 공정·장비 전문가로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우리 반도체 산업이 세계 1위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있는데 정부 연구개발(R&D) 지원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이다. 반도체 소자보다는 중소기업 위주로 구성된 데다 상대적으로 뒤처진 장비 부문에 정부 R&D 지원이 집중돼야 한다는 얘기다. 중소기업에 더 많은 정부 자금이 투입돼야 한다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 속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우리의 현황을 좀 더 들여다본다면 이런 주장에 우려를 표하게 된다. 반도체 소자 산업은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소자와 정보를 계산·처리하는 로직소자를 비롯해 아날로그 소자, 광소자 등을 만드는 산업이다. 한국을 반도체 강국이라 부르는 것은 전체 소자 시장의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는 메모리 시장의 1, 2위 기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스템반도체를 제조하는 소자 산업에서는 기술적으로나 시장 점유율에서 글로벌 선진업체에 뒤처진 게 사실이다. 반도체 장비는 특성상 소자집적 기술 발전과 함께 한다. 소자를 소형화, 고성능화하면 이에 필요한 공정과 장비 개발이 이뤄진다. 최근 스마트폰과 스마트패드 등 모바일 기기가 늘면서 AP, 모뎀칩 등 로직 제품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삼성전자를 포함한 소자 기업이 로직 신규팹 투자를 늘렸다.
자연스레 장비 시장에 대한 기대가 커졌지만 국내 장비업체 매출은 늘지 않았다. 메모리소자와 달리 로직소자에서는 우리 소자 기업이 기술적 우위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기현상이다. 따라가는 입장에 있는 국내 소자기업으로서는 안전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개발 능력이 뒤지는 국내 장비업체를 이끌어 가기 보다는 선진 소자기업과의 개발 경험이 있는 글로벌 장비 기업을 선택했다. 그 결과 소자 기업 투자의 과실은 외국계 장비 업체에 돌아갔다.
국내 장비 산업 동반성장을 위해서라도 소자 기술 리더십 확보는 필수다. 미래 소자 분야에는 III-V 화합물채널 기술이나 터널트랜지스터 등 다양한 후보 기술이 있다. 개발 성공률과 기술 성숙도를 고려할 때 개별 기업의 인하우스식 R&D로 이들 기술을 모두 연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불가능하다.
이에 대응해 미국 등에서는 컨소시엄을 통한 R&D가 활발하다. 경쟁 이전(Pre-competitive) R&D는 개별 기업에 수혜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관련 연구 에코시스템을 동반 성장시킨다. 마치 산업 인프라와 같다. 건강한 연구 에코시스템은 연구자를 양성하고, 우수 연구인력을 산업계에 공급한다. 미래를 위한 원천 연구를 효율적, 분업적으로 진행해 소자산업뿐 아니라 장비, 재료 등 전체 반도체 산업 성장에 도움을 준다. 이 분야에 기업과 정부 투자가 함께 필요한 이유다.
소자 산업 몰락 이후 관련 장비·소재 기업의 한국 이전에 노심초사하는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소자 산업의 건재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소자 산업이 중국 등 후발 국가에게 넘어가 산업 공동화를 유발하지 않도록 정부와 기업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최리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반도체공정·장비 PD rino.choi@in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