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재산의 중요성을 역설한 `12억짜리 냅킨 한 장`이라는 책은 2000년도에 출간한 생애 최초의 저서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에 유학생으로 정착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유학시절 다녔던 일리노이대학 캠퍼스에서 어느 날 반가운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평소 존경했고,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인 빅터 파파넥(당시 캔자스시티 아트 인스티튜트 교수)이 대학에 특강을 온다는 소식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파넥 교수는 유학을 오기 전 한국에서부터 그의 저서 `인간을 위한 디자인(원제 Design for the real world)`을 읽고 잘 알고 있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그의 특강 날, 강당 제일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강연 내내 부족했던 내 영어 실력 때문에 중요한 내용을 놓칠세라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강연이 끝나고 나서는 학생 신분으로 교수들만 초대했던 파파넥 교수의 만찬에 허락도 없이 참여했다.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도 절실했기 때문이리라.
당시 파파넥 교수가 앉을 헤드테이블에 떡하니 자리 잡은 것은 물론이고 바로 옆자리에 앉는 행운을 얻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행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동양 유학생을 위해 다른 교수들이 눈감아 주었던 것 같다. 저녁 식사 테이블 옆자리에서 파파넥 교수에게 서투른 영어로 나를 열심히 소개했다. 한국서 온 유학생이라고, 교수님의 책도 읽었노라고, 그리고 두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다고 거침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교수님! 저는 교수님의 책을 한국말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허락해 주신다면 교수님을 제 지도교수로 모시고 싶습니다.” 미리 연습을 많이 하고 가서 부탁의 말씀을 드렸지만, 바로 나온 “Yes!”라는 그의 대답에 내가 더 놀랄 지경이었다.
그날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시카고에서 파파넥 교수가 사는 캔자스시티로 열 여섯 시간씩 운전하고 다니면서 한 학기를 지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에게서 개인지도를 받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아마 그 기간 동안 파파넥 교수에게서 받은 커다란 영감으로 지금 실무에서 `디자인과 사람, 디자인과 사랑`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후 유학 시절과 창업을 거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교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저서를 수십 번 읽었고, 한국어로 번역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영어로 된 책을 다른 문화권인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고 번역을 포기하는 대신 내 생각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책은 나중에 `12억짜리 냅킨 한 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탄생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책 집필에 열중하던 때 카이스트에서 특별 강연 요청을 받았다. 유학생 시절에 파파넥 교수의 강연을 손꼽아 기다리다 기쁘게 만났던 때를 돌아보며 우리나라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일에 쫓기던 때라서 도착하면 바로 진행될 특강을 위한 준비가 너무 부족할 것 같았다. 비행기에 앉아 고민을 하다 카이스트 학생들을 위해 디자인이란 무엇인지를 말해주려는 생각으로 백지에 메모를 시작했다. 백지의 맨 위에 `디자인`이라는 제목은 적었는데,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점 몇 자를 찍고, 와인 몇 잔을 마시고 나니 물음표까지 쓸 수 있었다. 그러다 `디자인이란…?` 뒤에 느낌표를 찍었을 때는 아마도 와인을 거의 한 병은 마셨을 때였다.
다음날 대전의 카이스트 대강당을 가득 채운 학생들에게 한 시간 반 동안 비행기에서 메모한 39가지의 디자인에 관한 정의를 설명했다. 그날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과 반짝이는 눈동자들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강연을 마치고 돌아와 쓰던 책의 끝 부분에 `디자인이란?`이란 챕터를 실었다. 이 챕터의 내용은 당시 카이스트의 학생들에게 강연했던 핵심 내용들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39개의 디자인 정의와 세 번째 저서 `이매지너`로 전해진 `디자인은 나눔이다`의 40번째 깨달음은 이노 디자이너들의 확고한 디자인 정신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디자인 정신이야말로 요즘 우리나라가 찾고 있는 `창조경제`의 솔루션이라는 생각이 든다. 디자인을 알면, 창조경제가 보인다.
김영세 이노디자인 회장 twitter@YoungSe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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