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최저가입찰제에 발목잡힌 스마트그리드 사업

수년째 답보 상태인 국가 스마트그리드 원격검침 인프라(AMI) 구축사업에 활기를 불어넣을 목적으로 추진 중인 PLC칩(chip) 검증사업에서 사업 수행자로 선정된 기업이 자격 논란 시비에 휘말렸다. 상호 경쟁관계에 있는 국내외 4개 회사 칩의 성능을 검증하는 이번 사업에 특정 업체 칩을 독점 공급하는 회사가 선정됐다는 이유다.

28일 한국전력에 따르면 최근 한전 전력연구원이 발주한 `지중원격검침용 광대역 PLC성능비교시험 시스템` 수행 사업자에 로엔케이가 우선협상자로 선정됐다.

과제는 외산업체인 퀄컴과 마벨의 PLC칩을 포함해 국내 파워챔프와 크레너스의 칩을 비교·평가한 후 우수 칩을 선정해 국가 AMI 구축에 일부 적용할 목적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선정된 로엔케이는 성능경쟁을 펼쳐야 하는 4개 제조업체 가운데 파워챔프의 PLC칩을 독점 공급하는 업체다. 결국 자사가 공급할 칩을 포함해 경쟁사의 여러 칩을 평가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경쟁기업들은 편파적인 검증 결과가 나올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 경쟁사에 핵심 기술이나 정보가 흘러 들어갈 가능성도 있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퀄컴과 마벨은 로엔케이에 칩을 공급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로엔케이가 이들 4개 칩을 채택한 각각의 AMI용 통신모뎀과 데이터집합장치(DCU)를 제작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사의 기술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외산칩 업체 고위 관계자는 “선정업체인 로엔케이에 (AMI) 제작에 필요한 기술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과제 수행 능력 등 자격 검증보다 낮은 가격 위주로 업체를 선정하는 한국전력의 입찰제도도 도마에 올랐다. 또 다른 외산 칩 공급사 관계자는 “사업 수행 자격이나 능력에 대한 검증작업 없이 낮은 가격을 써낸 업체를 선정한 것은 한전 입찰제도에도 근본적인 허점이 있다는 것”이라며 “로엔케이가 경쟁사 칩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이고 칩을 확보하더라도 타사 칩을 다룬 경험이 없어 사업 수행이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같은 이유에서 한전 측도 원만한 사업 진행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한전 관계자는 “칩 업체가 이번 사업에 참여할 줄 몰랐고 최저가입찰제에서 우선협상자로 결정된 만큼 업체선정을 번복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과제 수행에 문제가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사업진행이 안 될 때에는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이번 사업은 도심이나 주거 밀집 지역 지중 선로의 AMI 통신 검침률을 높이기 위해 파워챔프와 크레너스가 개발한 한전PLC(24Mbps급)와 미국 퀄컴(24Mbps), 마벨(1Gbps) 칩을 평가한다. 사업 결과에 따라 2020년까지 추진하는 전국 1800만호 보급 사업에도 적용할 방침이다.


박태준기자 gaius@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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