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다름슈타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학·제약공장인 머크 본사가 여기에 있다. 머크는 1.2㎢에 이르는 거대 단지에서 300여년 동안 노하우를 쌓은 화학·제약 기술로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머크의 출발은 지난 16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사인 프리드리히 야콥 머크가 다름슈타트 중심가에 있는 `천사약국(Engel-Apotheke)`을 인수하며 `머크`는 시작됐다.
제약·화학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춘 것은 지난 1827년 하인리히 엠마뉴엘 머크 때다. 그는 다양한 알칼로이드 추출 방법을 개발하고, 실험실을 제약·화학공장으로 바꿔갔다. 19세기 후반 들어서는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명실상부한 공장으로 도약했다.
중심가에서 떨어진 현 부지로 공장을 이전한 것은 1904년이다. 천사약국 안의 작은 공장에서는 늘어나는 생산량을 감당할 수 없어서다. 현재 머크의 다름슈타트 본사는 주요 제품 연구개발과 생산을 책임진다.
단지에 들어서면 건물 외관만으로도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식 건물과 100년 넘은 건물이 혼재돼 있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많은 공장이 파괴된 이유도 있다. 오른쪽에는 100년된 벽돌식 건물이 보였다가 고개를 돌리면 첨단 유리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00년 전 알약을 만들던 기계가 골동품처럼 자리한 건물에는 마침 최첨단 장비가 새로 들어와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머크에 역사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다. 345년을 거치며 쌓은 노하우와 기업정신은 머크의 튼튼한 기초를 증명한다. 역사는 곧 미래기도 하다. LCD 액정사업이 이를 잘 말해준다. 액정은 125년 전인 지난 1888년 머크가 처음 개발한 기술이다. 당시에는 별다른 활용처를 찾지 못했다. 1966년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응용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다시 개발하기 시작했다. 머크가 현재 LCD 액정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한 것은 하루아침에 이룬 일이 아니다. 역사에서 미래 사업을 발굴한 예다.
역사에 대한 머크의 애정은 유별나다. 머크 박물관은 현재 대표 제품과 가계도를 보여주는 전시관과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한 기업의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건물 크기나 전시품 규모가 상당하다. 산업화 이전 약품 제조시설부터 제조방법과 같은 다양한 자료를 모아놓았다. 100여년 동안 머크가 내놓은 제품을 모아놓은 유리 캐비닛을 보면 그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박물관은 지역에서도 명물로 꼽힌다. 어린이들이 화학이나 제약에 관심을 갖도록 실험공간도 갖춰져 있다. 기자가 방문한 날도 지역의 어린이팀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머크의 대표 제품은
머크의 사업부는 크게 네 부문으로 나뉜다. △세로노 △컨슈머 헬스케어 △밀리포어 △퍼포먼스 머티리얼이다. 머크는 4개 사업부에서 지난해 매출 112억유로를 달성했다. 경제위기가 전 세계 화학 업계를 강타했지만 머크는 전년 대비 8.7%나 매출이 늘었다.
세로노사업부는 전문의약 부문이다. 다발성경화증, 종양, 난임, 내분비 분야 등 고도로 전문화된 치료약품에 집중하고 있다. 재발성 다발성경화증 치료를 위한 제제(레비프), 표적 항암제(얼비툭스)의 이름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레비프 매출은 지난해 18억9300만유로로 단일 품목으로는 머크 내에서 최대다.
컨슈머 헬스케어사업부는 일반의약품 부문이다. 소비자에게 머크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제품을 다룬다.
밀리포어사업부는 생명과학 제품군을 만든다. 바이오 의약품, 합성 의약품, 일반 실험실 애플리케이션에 필요한 제품과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바이오 마커 발견 검사법, 세포 분석 툴, 유세포 분석기 등이 대표적이다.
퍼포먼스 머티리얼(기능성 소재)사업부는 액정사업과 첨단기술, 펄 안료, 화장품 활성 성분 사업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 중 비중이 가장 큰 것은 액정사업이다. 액정 뿐만 아니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백색 발광다이오드(LED)용 형광체, 유기 박막트랜지스터(TFT), 태양전지 유기물질, 전자태그(RFID) 칩, 광학 보정 필름용 RM(Reactive Mesogens) 등도 다룬다.
안료와 화장품 원료도 빼놓을 수 없다. 머크는 코팅, 플라스틱, 프린팅, 화장품, 식품 등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펄 안료를 제공한다. 펄 안료는 무지개빛 효과로 광택뿐만 아니라 채색 및 금속성 느낌까지 표현할 수 있어 응용 범위가 넓다.
◇독특한 가족경영 구조
머크는 가족경영 체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공개 기업이다. 독특한 구조다. 머크그룹 지분 70%는 모기업 `이머크(E.Merk KG)`가 갖고 있다. 이머크는 머크가(家)가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는 곳이다. 가족 130명이 지분을 공동 보유한다.
그러면서 경영은 분리했다. 전문경영인인 `비(非)머크` 사람들이 이끈다. 머크가 사람들은 경영에 관리감독만 할 뿐이다.
머크 가족이 소유했다고 해서 어느 특정인의 입김에 의해 회사가 좌지우지되지는 않는다. 이머크 내에는 가족 5명과 외부 사람 4명으로 구성된 파트너위원회가 있다. 이들이 머크 최고경영위원들의 선임·해임권을 갖는다. 또 인수합병 등 회사의 주요 결정사항을 승인한다. 파트너위원회가 승인하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 그리고 그 분리의 균형은 300여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이뤄진 것이다.
◇머크의 힘은 혁신, 그리고 지역
지난해 머크가 달성한 실적에 칼 루드비히 클레이 회장은 “345년의 머크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변화 프로그램 중 하나를 순조롭게 이행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경영 환경에도 불구하고 사업 확장에도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머크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때로는 확장을, 때로는 축소를 외치면서 효율성도 높였다. 다름슈타트 단지는 그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다름슈타트 단지 내에는 자체 에너지 생산 시스템을 갖췄다. 그것도 천연가스를 이용한 발전소다. 머크의 근간이 돼 온 지역환경을 생각하면서 효율도 높일 수 있는 구조다. 이를 통해 에너지 소비량과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꾸준히 줄여갈 수 있었다. 물류는 머크에 맞닿은 기차역인 `머크역`을 주로 활용한다. 지역의 배려다. 머크도 지역에 공헌한다. 공장 내 화재에 대비한 소방서는 지역에 화재가 발생할 때에도 출동한다. 공장에서 발생한 폐기물은 철저하게 관리하고 재활용한다. 지역 청년들의 과학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다. 주민들을 위한 전시회나 공연, 스포츠 활성화도 지원한다.
머크의 홍보총괄 마커스씨는 “한 지역에서 300년이 넘게 성장하다 보니 고용을 비롯해 지역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머크도 지역에 공헌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름슈타트(독일)=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