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Q, CQ… 여기는 HL1BX입니다. 잘 들립니까? 잡음이 좀 들리네요. 신호를 키우기 위해 안테나 방향을 좀 바꿔볼게요.”
서울 양재동 한 주상복합건물. 한 노(老)신사가 방 안에서 복잡하게 설치된 무선기기를 이리저리 조작한다. 무선기기 안에서 들려오는 신호(목소리)가 조금씩 생생해졌다. 한참을 몰두하던 그가 이윽고 머리를 돌렸다. “오늘은 감도가 굉장히 좋네요.”

노신사는 서정욱 전 과학기술부 장관이다. 방 한쪽 벽을 가득 메운 무선장비는 흔히 `햄(HAM)`이라고 불리는 아마추어무선국으로, 서 전 장관의 평생 취미다. 아마추어무선 세계에서 그의 이름은 HL1BX다. 이 `콜 싸인`과 함께 한 지도 벌써 50년째다.
“몇일 전에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 아마추어 무선국하고 교신했어요. 내가 여기에 앉아서 전파를 타고 세계 곳곳을 날아다녀요.”
서 전 정관은 최근 거주하는 20층 고층건물 옥상에 안테나를 세웠다. 무게 50㎏, 회전 반경 약 10m. 그는 “아마 개인이 보유한 것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6개월 간 발품을 팔아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 일본에서 부품을 구했다. 옥상에 철탑을 세우고, 100m가 넘는 케이블로 안테나와 무선기기를 연결했다. 3월 말 안테나를 철탑에 얹고 시험과 조정에 들어갔다. 아마추어무선연맹을 비롯해 각계에서 손을 보탰다.
여든의 나이에 이 같은 대공사를 벌인 까닭이 궁금했다. “개인 취미 차원에서 한 일만은 아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익명성 등으로 무질서, 무절제, 무책임하기 쉬운 정보통신 풍토에서 젊은이에게 건전하고, 창조적인 취미를 전파하고 싶었어요. 봐라, 나도 이 나이 되도록 평생 취미로 노년을 즐기며 뭔가에 몰두하고 있다. 취미를 초월해 재난통신 등 인류의 안녕복지를 위해 자원봉사도 한다. 뭐 이런 것. 취미를 자랑도 좀 하고 싶고. 하하”
서 전 장관은 우리 정보통신역사의 산 증인이다. 1970년대 국방연구개발, 1980년대 디지털교환(TDX), 1990년대 이동통신(CDMA) 등 굵직한 국가사업을 진두지휘했다. 국방과학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원, KT, SK텔레콤 등에 그의 족적이 남아 있다.
서 전 장관은 요즘 젊은 세대가 더 도전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젊은이들이 인터넷 등 좋은 문명을 테러, 중독 또는 소모적인 것에 악용하고, 남용한다는 쓴 소리도 했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 간 고등학교 시절 HAM을 접했다. 무선통신하면서 간첩으로 의심받은 적도 있었다. 직접 통신기기를 조립, 분해, 설치해보면서 창조정신과 실용지식을 축적했고 전공도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정했다.
서 전 장관은 “세상 일은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며 “과학기술도 요즘에는 뭔가 체험해보려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안 하는 것 같다”고 세태를 꼬집었다.
“예전만 해도 직접 장비를 만져보며 잔뼈가 굵은 아마추어 무선 키드들이 자연스럽게 정보통신산업에 진출하곤 했거든요. 근데 요즘은 교육제도가 그래서인지 다들 지엽적인 문제에만 몰두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게 아쉬운 거죠.”
원로로서 새 정부에 대한 우려와 기대도 피력했다. 무실역행(務實力行:실속 있게 실행함)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비범한 일을 해내고자 하는 것이 시스템 사고”라며 “그런데 우리는 천하의 수재를 모아놓고도 평범한 일도 못하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에는 선진국을 따라가는 것을 목표로 단순히 벤치마킹하고 자원을 쏟아 붓는 전략이 유효했지만 이제는 예전과 차원이 다른 국가 발전전략이 필요하다는 조언도 내놨다. 그러려면 교육에서부터 창의성을 자극하는 전향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입시, 취업을 위한 공부가 아닌 개인의 재능과 관심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교육 시스템이 재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새 정부 그리고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옛 것을 익히며 새 것을 앎)해주세요. 99% 평범함 속에서 1%의 비범함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게 요즘 흔히 말하는 창조경제의 바탕일 겁니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