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23>김대중 대통령의 국정노트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기존 관행을 부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먼저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도록 내각에 지시했다. 그리고 국정(國政)을 꼼꼼하게 챙겼다. 김 대통령은 대학노트 크기에 자필로 국정 운영에 관한 사항을 깨알같이 기록했다. 이른바 `국정노트`였다. 김 대통령은 재임 중 27권의 국정노트를 작성했다.

1998년 3월 5일 오전 청와대.

3월의 청와대 경내는 파릇파릇한 봄기운이 완연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날 본관 2층 세종실에서 열린 국무회의 모두(冒頭)발언에서 `호칭(呼稱)` 변경을 당부했다.

“앞으로 각하(閣下)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각료들은 귀를 의심했다.

“각하라고 부르지 말라니.”

김 대통령은 장관들의 속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보통 말할 때는 `대통령`이라고 하면 됩니다. 대통령 자체가 높임말입니다. 선생도 사장도 그 자체가 경칭입니다. 보통 말할 때는 `대통령`이라고 하고 나를 호칭할 때만 `대통령님`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김 대통령의 이런 당부는 자신이 혁신의 기수로 `국민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의 말.

“그동안은 대통령을 각하라고 불렀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후부터 대통령님으로 국무회의 석상에서 불렀어요.”

김성훈 농림부 장관(상지대 총장 역임, 현 중앙대 명예교수, 환경정의 이사장)은 “첫날 대통령은 모두 발언에서 `앞으로 나를 각하라고 호칭하지 말라. 그냥 대통령님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아주 작은 것에서 큰 길을 찾고 아주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 김 대통령의 세심하고 통큰 국정 철학을 국무회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 대통령의 회고록 증언.

“내게 각하라는 말은 권위 덩어리처럼 여겨져 듣기에 섬뜩할 정도였다.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도, 취임 후에도 여러 차례 회의에서 강조했다. 그러나 한동안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각하를 없애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공직사회에서는 관행으로 `대통령`을 `각하`라고 불렀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까지 대통령을 `각하`라고 호칭했다. 정부 출범 초기에는 사단장이나 군 사령관 등 장군들도 각하로 불렸다. 하지만 대통령을 각하라고 호칭하면서 이 말은 권위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한때는 뉴스 시간에 앵커가 `000 대통령 각하`라고 했다.

김 대통령은 이에 앞서 청와대 수석비서관에게 `각하`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김 대통령은 2월 25일 오후 3시 본관 2층 접견실에서 김중권 비서실장(현 변호사)과 안주섭 경호실장(국가보훈처장 역임) 및 수석 비서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대통령을 부를 때 왜 `대통령 각하`라고 부르느냐”며 김중권 비서실장에게 질문한 뒤 “대통령이라는 말 자체가 존칭인 만큼 앞으로 `각하`라는 호칭을 쓰지 말라. 만약 대통령이라는 직함으로만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면 `대통령님` 정도가 좋겠다”고 말했다.

김중권 비서실장은 이에 대해 “이제까지 해온 대로 `각하`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답변했지만 김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중권 당시 비서실장의 회고.

“나는 대통령과 대화할 때 `각하`라고 부르는 것이 편하고 또 그 말에는 국가원수에 대한 존경의 뜻도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각하`라는 말이 권위적이라기보다는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예우이고 관례적으로 사용해 온 말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에게 `님`자도 붙이지 말자고 했다.”

처음 `각하`란 말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 대통령은 `보통 사람들의 시대`를 표방한 노태우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집권하자 각하란 말과 대통령 부인을 호칭하는 `영부인(令夫人)`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각하`라는 호칭은 김영삼 정부까지 사용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2008년 2월 29일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현 외교통상부 언론문화협력 특임대사)을 통해 “정부에서는 대통령을 호칭할 때 `님`자를 붙이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두 번째 지시는 전국 관공서에 대통령 사진을 걸어놓지 말라는 것이었다.

김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밝힌 증언.

“대통령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테고 매일 신문이나 TV에 나오는데 따로 대통령 사진을 걸어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관광서는 물론이고 동사무소, 경찰지구대까지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다. 또 경제난에 나라 전체가 신음하고 있는데 수만장의 사진을 새로 보급하는 것 자체가 낭비였다.”

김 대통령은 취임 이후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의 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바로 `국정노트`였다. 이 노트는 장관들에게는 공포의 노트였다. 김 대통령 옆에는 늘 이 노트가 놓여 있었다.

김 대통령은 이 국정노트에 일자별, 부문별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지시사항을 직접 적었다.

이와 함께 국무회의와 관계부처 장관, 각 부처의 업무보고 내용과 주요 보고서 숙지사항, 주요인사와 면담 시 참고자료 등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한명숙 당시 환경부 장관(국무총리 역임. 현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의 회고.

“김 대통령에게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장관들이 보고를 하거나 토론을 할 때 항상 깨알같이 메모한 노트를 옆에다 놓고 대화했다. 노트에 쓴 글씨는 인쇄한 것처럼 반듯했다. 사례를 들 때도 연도와 날짜, 사람 수까지 빈틈이 없었다. 장관들이 아무리 준비해도 늘 모자랐다.”

박선숙 당시 청와대 대변인(환경부 차관, 18대 국회의원 역임)의 말.

“중요한 회의 때는 꼬박꼬박 그 노트를 챙겼고 보고받을 때도 중요한 내용은 일일이 기록했기 때문에 대통령의 5년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경환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현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연세대 객원교수)의 말.

“김 대통령은 이 노트에 각종 회의에서 해야 할 이야기 요지를 직접 적었습니다. 주요 내외신 회견을 앞두고도 할 말을 먼저 적었습니다. 퇴임할 때 이 노트는 27권이나 됐습니다. 이 노트는 지금 대통령 기록관에 넘겨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국정노트 1권에는 김 대통령이 정한 대통령 수칙(守則)이 적혀 있다. 국정운영의 원칙을 정한 것인데 15개 항목이다. 김 대통령은 이 대통령 수칙을 자필로 기록했다.

대통령 수칙은 △사랑과 관용, 그러나 법과 질서를 엄수해야 △인사정책이 성공의 길, 아첨한 자와 무능한 자를 배제-이와 관련해 김 대통령의 인사원칙은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리를 준다”였다. △규칙적인 생활, 적당한 운동, 충분한 휴식으로 건강유지 △현안 파악 충분히, 관련 정보 숙지해야 △대통령부터 국법 엄수의 모범 보여야 △불행한 일도 감수해야, 다만 최선을 다하도록 △국민의 애국심과 양심 믿어야, 이해 안 될 때 실명 방식 재고해야 △국회와 야당의 비판 경청, 그러나 정부 짓밟는 것 용납 말아야 △청와대 이외의 일반시민과 접촉에 힘써야 △언론보도 중시하되 부당한 비판 앞에 소신 바꾸지 말아야 △정신적 건강과 건전한 판단력 견지해야 △양서를 매일 읽고 명상으로 사상과 정책 심화해야 △21세기에 대비를, 나라와 국민의 미래 명심해야 △적극적인 사고, 성공의 상(像)을 마음에 간직 △나는 할 수 있다. 하느님이 같이 계신다 등이다.

김 대통령은 또 재임 중에 휘호를 써서 현판을 만들거나 돌에 새기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김 대통령은 수많은 곳에서 휘호 요청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김 대통령은 그 이유에 대해 “우선 내 글씨에 자신이 없었고 아무리 의미가 있어도 세월이 지나면 다 바래지고 지워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한 곳만 예외로 했다. 국가안전기획부가 국가정보원으로 거듭날 때 이종찬 원장(현 우당장학회 이사장)의 부탁으로 원훈(院訓)인 `정보는 국력이다`는 휘호를 써주었다. 국가정보원은 이 휘호를 돌에 새겨 국정원 마당에 세웠다. 나중에 국정원을 방문한 김 대통령은 이 돌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알고는 이름을 지우도록 지시했다.

김 대통령은 치밀하고 논리적이어서 청와대 당시 출입기자들은 “김 대통령의 말은 받아 적으면 그대로 기사가 된다”고 말했다.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온 동교동계 비서 출신 J씨는 김 대통령에 대해 “야당 지도자 시절 기자회견이나 상대 설득을 앞두고는 어김없이 서울 동교동 지하 서재에 묻혀 자신의 논리를 세웠다. 논리가 타당하고 누구와 논쟁해도 지지 않을 확신이 서야 비로소 입을 열고 행동했다”고 증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관행을 바꾸면서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줬다. 새 정부의 변화 모습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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