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세의 디자인스토리]<2> T라인, 한국인의 정체성을 그리다

◇ 태극, 국기에 대한 상징

우리나라에서는 국가 상징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국기를 볼 때마다 경례를 해야만 했다. 예고 없이 비가 오는 날이면 게양된 국기를 내리느라 담당 공무원들이 속을 많이 태우기도 했다. 그 배경에는 일제 치하에서 억압받던 민중의 굴하지 않는 애국심에 대한 상징성이 담겨 있다. 1950~1960년대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정부에서 실시했던 정책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태극기는 그렇게 경외의 대상이지만 실생활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1996년에 돼서야 “지금까지는 태극기 디자인을 생활용품 등에 활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왔으나, 앞으로는 이를 적극 활용하도록 태극기에 대한 국민들의 친근한 이미지를 형성토록 한다”는 국무총리령 `태극기 사랑 운동 실천지침`으로 인해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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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말 그대로 `피부에 닿을 만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은 바로 온 국민 축제의 해였던 2002년이었다.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태극기는 국민에게 그 어느 때보다 친근하고 밀접하게 다가왔다.

그보다 5년 전부터 생각해 오던 나의 컨셉트 아이디어가 시대를 만나서 세상으로 나오게 된 계기도 바로 그 즈음이었다. 당시 태극기 패션은 국민적 신드롬이 돼 젊은이들의 `멋`이 됐다. 나는 태극기 패션을 보며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우리 젊은이를 위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상품의 개발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디자인에 좀 더 빨리 착수했더라면 2002년 대한민국 전체를 들썩인 온 국민의 열정을 대변할 만한 상품이 나왔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디자인 실물화에 박차를 가했다.

◇ 한국적 디자인이란

외국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모국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게 마련이다. 나는 미국에서 20여 년을 살아온 시점에 고국에 대한 생각, 특히 디자이너로서 자연스럽게 한국적 디자인이란 뭘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돌이켜보니 태극의 둥근 선과 사괘의 곧은 선만큼 한국인을 잘 표현하는 것이 없었다. 태극의 곡선은 부드럽고 유연한 기질을, 또 사괘의 직선은 한국인의 강직함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스케치를 하면서 태극의 곡선은 유독 그 선이 오묘하고 재미있어 직선과 곡선의 조화로 어떤 디자인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부분을 잘라서 확대해 활용하거나 겹쳐서 볼 때도 매우 아름다운 패턴이 된다.

나라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해서 태극 패턴은 이미 우리 주변에 범람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소비자의 높은 수준에는 맞지 않아 실패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태극을 이용하되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춘 현대적 감각을 잘 살려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세계인의 마음 속에 한국의 이미지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다.

2003년 서울 이노 브랜드를 통해 테이블웨어, 노트류, 스카프 등을 시작으로 `T라인(태극라인)`을 런칭했다.

◇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브랜드로

기존의 디자인 컨설팅 업무는 정해진 제품에 최적화된 디자인을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T라인은 디자이너의 고유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여러 가지 제품과 영역에 적용하여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새로운 디자인 비즈니스 모델이다. 이 디자인 아이덴티티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으며 응용될 수 있는 언어로 표현돼야 한다. 따라서 매우 고차원적인 감성과 표현력이 필요하다. 디자인 선진국들에서는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이 디자인 경쟁력과 상품력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직 우리나라는 이 기반을 갖추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T라인의 론칭은 우리나라 디자인 산업의 한 단계 도약을 준비하는 혁신으로 시작했다.

콘텐츠가 있다면 제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 콘텐츠를 만드는 작업이 바로 정체성 확립이다. 태극의 이미지는 그런 면에서도 적절한 디자인 아이콘이었다. 그 자체가 국민이 주인이 된 대한민국의 상징이니 말이다. T라인은 국내 최초의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 브랜드다. 우리의 태극을 일상과 세계에 각인시킬 명확한 디자이너의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새롭게 제작된 토탈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다. T라인은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제안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리빙웨어와 퍼스널웨어의 카테고리를 기반으로 식기류, 리빙 패브릭, 퍼스널 액세서리, 필기류 등의 다양한 아이템을 선보였다. 또 디자이너 브랜드로서 고감도 디자인을 구현하면서도 해외수입 브랜드 대비 합리적인 가격대를 통해 차별화를 꾀했다.

◇ 세계적 디자인 브랜드에 인정받다

2000년 초반에 나는 미국의 애크미(ACME)사로 부터 놀라운 제안을 받았다.

애크미 브랜드는 명망 있는 예술가·건축가·디자이너를 초대해서 생활용품·패션, 액세서리·필기용품 등 다양한 제품을 디자인·생산·판매를 하는 세계적 기업이다. 나에게는 멘토였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산업 디자이너 에토르 소사스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은 나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작품들은 주로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 미술관 내의 뮤지엄 숍과 최고급 백화점 매장에서 판매됐다.

내가 동경하던 브랜드의 기업이 나를 초대했을 때 나는 놀랄 정도로 기뻤다. 세계적 수상작품을 통해 그들이 나를 인정했다는 사실에 감동했고 흥분했다. 애크미 미국 본사에서 마주한 그 회사 대표와 경영인 앞에서 나는 `한국의 현대적 아름다움`을 보이기로 약속했다. 약 1년 후 `한국의 선(T라인)`으로 창조한 내 작품을 보고 이번에는 애크미 경영진이 감동하고 흥분했다.

세계 시장에 나온 내 작품은 묵묵히 `모던 코리아(Modern Korea)`를 각인시켰다. T라인은 문화와 예술의 최고봉을 수집하는 세계 최고의 고객에게 펜, 생활용품 등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 T라인은 한국 사랑이다

최근 나의 딸 리아는 여행 중 백화점에서 내가 디자인한 애크미 T라인 펜을 봤다고 한다. 반가워서 매장 직원에게 `아빠가 디자인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직원이 `그 제품이 베스트셀러`라고 말하며 함께 기뻐했다고 한다. 해외에서 아빠의 작품을 보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던 딸의 기쁜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더 큰 힘을 얻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디자이너로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 나는 고마움과 자부심을 느낀다.

`한국 사랑`이 나의 T라인 컬렉션의 핵심이다. 지난해 12월 `박물관 나들길` 오프닝 행사 때도 같은 마음으로 인사말을 한 기억이 난다.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나들길 프로젝트에서 내가 표현 했던 것은 한국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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