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구루` `열정 전도사` 세계적 산업디자인 전문가 김영세 이노디자인 회장이 중견, 중소기업의 역량 강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 중소, 중견기업이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디자인 경영`을 강조했다. “최고경영자가 디자이너일 필요는 없지만, 디자이너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며 산업의 변화를 이끌어낼 디자인 혁신을 주문했다. 이노디자인은 일찍이 아이리버의 MP3 플레이어 디자인을 맡아 4년 만에 매출을 80배나 성장시킨 신화를 만들어낸 바 있다. 삼성전자의 애니콜 가로본능, 라네즈의 슬라이딩 팩트 등도 그의 작품이다.
김 회장은 `디자인`을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더욱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열쇠로 제시했다. “똑똑해진 소비자를 상대로 단순히 대량 생산과 광고만으로 시장점유율을 키우겠다는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며 “창조적 디자인으로 가치를 전달하고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음점유율`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 명의 뛰어난 전문 디자이너보다 디자이너의 마음가짐을 가진 열 명의 직원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바라봤다.
-처음 산업디자인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언제인가요.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그림보다 더 신기한 것을 발견했어요. 열 여섯 살 때 우연히 친구 집에서 미국의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란 잡지를 봤어요. 보자마자 `이건 나의 직업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에 국내에는 산업디자인이란 단어를 아는 사람조차 없었을 때입니다. 그때부터 공대를 가든 미대를 가든 나의 미래는 산업디자이너라고 결심을 했고, 1970년대에 미국 유학을 가게 됐죠.
-회장님은 1986년에 미국 실리콘밸리에 한국인 최초로 디자인 전문회사를 세우고, 1999년에 이노디자인 코리아를 만들었습니다. 첨단산업의 중심에서 산업디자인 불모지나 마찬가지인 한국에 회사를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그래서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부터 한국에 디자인 전문회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습니다. 유학을 가서 비행기를 타고 내리자마자 미국의 엄청나게 발달된 모습에 놀랐어요. 그 순간에 열심히 배워서 한국에 디자인의 뿌리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결정했고, 결국 생각한 대로 이뤄졌습니다. 미국의 디자인 전문회사에서도 일하고 교수 생활도 하고, 실리콘밸리에서도 일하면서 준비를 했죠.
-IMF 이후라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디자인 전문회사를 세우는 것이 더욱 어려웠을 텐데요.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이 병원을 찾아가듯이 기업이 힘들면 디자인 회사를 찾아가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경기가 안 좋을 때 디자인 수요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경기를 되살리려면 창조를 해야 하는데, 크게 봤을 때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디자인입니다. 100% 모든 회사가 그런 결정을 할 수는 없고, 1~2% 회사가 그런 결정을 내리더라도 어떻게 일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당시 디자인에 주목하고 컨설팅을 받기 시작한 기업이 삼성과 LG 같은 회사고, 세계 일류 기업으로 성장했죠.
-그때와 비교하면 한국의 디자인 역량이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실리콘밸리에 처음 회사를 세우고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초반입니다. 당시 30대 초반의 나이에 삼성, LG 같은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를 만나 `디자인은 이런 것`이라고 직접 설득했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 기업들이 주문자위탁생산(OEM)을 많이 할 때였습니다. 국내 기업이 만들었지만, 브랜드는 외국에서 가져왔죠. 자체 제품과 브랜드 없이 어떻게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디자인의 중요성을 깨닫고 투자를 시작한 기업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20년 뒤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됐습니다. 중소, 중견 기업들이 당시 그 기업들이 했던 고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세계 시장 진출에 걸림돌을 만났어요. 그동안은 가격, 물량, 대량 생산 등의 경쟁력이 있어 버텼는데, 지금은 그 게임에서 지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이 넘어야 할 산이 브랜드와 디자인입니다. 자기 브랜드와 디자인 없이 세계 시장에 성공한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렇다면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디자인은 너무 쉬워 보여서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제대로 디자인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시작해 책을 쓴 것이 이미 여러 권입니다. “저거 너무 예쁘다” “잘 팔리겠다” 수준이 아니라 최고경영자가 디자인을 알려면 광범위한 의미의 디자인 전부를 이해해야 합니다.
쉽게 설명할 때 드는 예시 중에 하나로 디자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모든 정성을 쏟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듯이 디자인을 하라고 이노디자인 직원에게도 말합니다.
최근에는 디자인은 나눔이라고 말합니다. `상술`이 아니라 `진심`이 디자인입니다. 돌이켜보면 기업의 목적도 공유입니다. 창업자가 다른 이가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공장에서 생산하고 유통을 거쳐 판매하는 것이 회사죠. 결국 기업의 좋은 아이디어와 경험을 소비자와 나누는 것입니다. 과도한 마케팅이 그런 질서를 무너뜨리고 가려 놓으면서 소비자가 기업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소비자는 생산자를 믿지 않으려 하고, 생산자는 광고로 제품을 밀어내려고 합니다. 잘못된 거죠. 디자인의 원천은 공유고 창의입니다. 잘 만든 디자인은 경제를 살리는 원천입니다.
-최근 생산자와 소비자가 점점 더 대립하는 개념처럼 느껴집니다. 물건을 사면 손해 본다는 느낌마저 줄 때가 있어요. `기업에 속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소비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거나 광고를 하면 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제품의 선 하나도 소비자를 생각하면서 그어야 합니다.
해외 지인에게서 한국의 제품 디자인은 왜 이렇게 자주 바뀌나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디자인이 자주 바뀌는 것은 별로 좋은 게 아닙니다. 왜 냉장고 표면에 꽃을 그려야 하나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가 고갈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디자인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죠. 또 디자인이 너무 자주 바뀌면 비용 부담만 늘릴 수 있습니다. 마케팅의 일부일 수 있지만, 일류 마케팅은 아니죠.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이것도 결국 과잉 생산, 과잉 소비로 보입니다. 결국 지나치게 자주 바뀌는 디자인 비용은 누가 감당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업이 시장점유율에만 매달리면 기업과 소비자 모두가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좋은 디자인은 화려한 변신으로 가상의 시장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정말 좋은 디자인은 소비자에게 필요한 가치를 전달합니다. 이제는 디자인 전략을 바꿔야 할 시기입니다. 더 많이 더 빨리 팔리는 데에만 몰입하면 똑똑한 소비자는 그런 모델을 외면할 것입니다.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연구하는 게 디자인 정신입니다. 있는 것에 겉치레를 만들고, 시장에 쏟아내는 일에서 한국기업은 손을 떼야 합니다. 그런 분야는 한국보다 인건비가 싸고 자원이 많은 후발 국가에 넘겨줘야 할 시기지요.
-좋은 디자인이란 어떤 것을 고려하고,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할까요.
▲디자인이 단순히 눈에 띄는 것이라면, 그 수준에서는 히트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소비자는 단순하지 않아요.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디자인은 첫째 달라야 하고, 둘째 의미가 담겨야 하고, 셋째 소비자를 기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제품 디자인만 아니라 공간, 패션, 그래픽, 사용자 경험(UX), 서비스까지 모두 유기적으로 얽힌 것이 디자인입니다. 이것이 어떤 기업에는 브랜딩이고, 어떤 기업에는 디자인이기도 합니다.
기업은 소비자의 마음을 정복해야 합니다. 시장점유(마켓셰어)만으로 성공할 수 없어요. 고객의 마음을 차지하는 마인드셰어가 필요합니다. 잘 만든 디자인은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일류 기업은 소비자를 기다리게 만듭니다. 애플이 가장 잘하는 일이죠.
성공적 브랜딩이란 기업이 소비자에게 로고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기업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최고경영자가 광범위한 디자인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시대가 바뀌고 소비자가 똑똑해진 만큼 기업도 디자인을 공부하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최고경영자가 디자인을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스티브 잡스도 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매우 높았던 경영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스티브 잡스는 디자인에 대한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 디자인은 영혼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어떤 경영인과 비교할 수 없는 최강의 표현입니다. 솜씨나 실력을 떠나 이미 그는 디자이너로서는 가장 완벽한 최고경영자였어요. 오해하면 안 되는 게 디자이너가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경영자가 디자이너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자기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기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를 상상할 때 즐겁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해`라는 거죠.
-우리 기업이나 최고 경영자가 디자인 마인드를 가지려면 어떤 훈련을 해야 하나요. 단순히 디자이너를 얼마나 고용하는지, 얼마나 투자하는지의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단계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디자인을 장식이나 생산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뤄지는 작업이 아니라 회사의 A부터 Z까지,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술 개발이나 상품기획, 마케팅 이런 일을 다 하고 나서 나중에 디자인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디자인이 상품 개발의 시작이자 첫 단추라고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질문부터 바뀝니다. 이 제품을 누구에게 팔 것인가,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면 어떤 기능을 만들어야 하나, 기술은 어디까지 나왔나, 어디서 가져와야 하나를 차례로 생각하게 되죠.
최고경영자가 디자인 과정을 따로 듣는다거나 데생을 한다거나 그런 초보적인 과정에 머무를 필요는 없습니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어요. 디자인을 중요시하는 게 디자인 전문가의 수와 직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애플의 디자인 전문가가 열 명 남짓일 수도 있겠지만, 애플의 직원 전체가 디자인 전문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직원 전부가 디자인 마인드로 무장한다면 전문가 몇 명이든 대항할 수가 없어요.
-어떤 일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요?
▲디자인은 전사적이야 합니다. 기업의 문화가 바뀌는 일이에요. 디자인은 사실 서구문화기 때문에 아직 우리 토양에 그대로 이식하기가 쉽지 않아요. 디자인이란 말 자체도 우리말로 마땅히 바꿀 만한 것이 없잖아요. 기업문화, 최고경영자의 철학도 바뀌어야 하죠. 변화의 단위가 생각보다 큽니다. 세계 일류 기업이 된 기업의 경영자들은 20년 전에 깨달은 바죠.
우리가 디자인 트렌드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부터 고민해봐야 합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혁신은 혼자서 연구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 기업과 기업, 만남과 소통과 교류에서 서로 생각하지 못한 제3의 지점을 발견합니다. 다양한 접점과 교류에서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이지요.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책을 쓴 스티븐 존슨도 연결, 융합, 재결합의 과정에서 오는 혁신을 강조했어요. 협업이죠. 단순히 문을 열어 놓는다는 `오픈`의 개념보다 한발 더 나아간 개념입니다. 창작은 대화에서 많이 나옵니다. 저 역시 클라이언트와의 첫 만남, 대화의 순간에서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디자인은 결국 사랑이고, 다른 사람을 위한 나눔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김영세 이노디자인 회장 주요 약력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산업디자인과 석사
미국 듀폰 디자인 컨설팅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산업디자인과 교수
이노디자인 창립, 이노디자인 대표
2012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통령상 문화훈장 옥관
국가경쟁력위원회 자문위원
한국디자인브랜드경영학회 이사
국립현대미술관 자문위원
국립중앙박물관 자문위원
김명희기자 noprin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