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한 대학교 이야기다. 몇 년 전부터 이 학교에는 커밍아웃 바람이 불었다. 교수 사회에서 본인이 모교 출신임을 떳떳하게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거나 해외 유명 대학에서 학위를 받지 않았으면 명함도 내밀지 못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모교 출신임을 쉬쉬하던 이 학교에 커밍아웃이 줄을 잇는 이유는 간단하다. 저명한 석학을 교수로 채용하고 해외 대학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우수한 학생이 몰려 몇 년 사이에 학교 위상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류, 삼류대 출신이라 생각한 탓에 떳떳하지 못해 하던 과거와 대조적이다.
최근 한국수력원자력에 회사 배지를 떼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수원 직원임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30∼40년 전만 해도 한국전력(2001년 한수원과 발전 5사가 한전에서 떨어져 나왔고 올해 시장형 공기업으로 첫발을 뗐다)은 모든 국민이 선망하는 공기업이었다. 한전에 다닌다는 이유 하나로 일등 신랑감 대접을 받기도 했다. 한전은 공기업 가운데서도 맏형 대접을 받는다. 한수원은 한전의 자회사기는 하지만 국내 전력공급의 30% 이상을 책임지는 원자력과 수력을 담당하는 거대 공기업이다. 직원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런 한수원 직원들이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던 회사 배지를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올해 한수원에는 유난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잦은 고장으로 인한 원전 가동 중단은 기본이고 원전 고장 사실 은폐 의혹, 짝퉁 부품 논란, 마약 투여, 부품 품질 보증서 위조 등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직원은 본인과 직접 상관은 없지만 주위 사람들이 마치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원전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사고가 한 번 날 때마다 국민 신뢰는 한 계단씩 무너진다. 사고가 한 번씩 터질 때마다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은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늘 기대 이상이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 이제 나올 만한 사고는 다 나온 듯하다. 오히려 어지간한 사고로는 놀라지도 않을 정도가 됐다.
각종 사고와 사건의 책임은 누군가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을 물어 사표를 종용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끝까지 책임지고 사고를 마무리 지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으로 책임지는 자세다. 책임지는 주체는 한수원이다. 사고가 터지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쪽도, 현장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람도 원전 종사자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죄책감으로 사기가 떨어져 있는 한수원에 던지는 날 선 비판은 좋은 처방이 아니다. 원전 종사자가 패닉 상태에 빠지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따끔한 채찍과 함께 따뜻한 응원의 목소리도 필요하다. 한수원 역시 부끄러움에 떼어 낸 배지를 다시 달고 일하는 모습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주문정 논설위원 mj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