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리노 인하대 신소재공학과 교수
1980년대 후반 NEC, 히타치 등 일본 업체들은 전 세계 D램 시장의 80%를 장악했었다. 또 소니, 파나소닉 등 종합가전회사가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도 약진하며 조만간 일본이 세계 반도체 산업을 정복하는 듯 보였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1987년 14개 자국 업체들의 공동 연구를 위해 `세마텍(SEMATEC)`을 설립했다. 정부도 대규모 자금을 투자했다.
20여년이 지난 현재 위풍당당했던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존폐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반면 미국은 인텔, 글로벌파운드리, IBM, 마이크론 등 소자 기업과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를 비롯한 대형 장비 회사와 퀄컴, 브로드컴 등 팹리스 업체들이 함께 포진하며 건강한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쇠락은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산업에 얼마나 우수한 인력이 유입되는 지와 핵심 소자 기술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지난 10여년 간 일본 반도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엔지니어들의 면면은 변하지 않으며 노쇠화 되고 있다. 그들의 우수성을 나타내지만, 반대로 이후 세대들이 앞 세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는 개별 회사 내에서 이전 세대가 정한 기술에 대한 도전이 줄어들고 원가절감 등의 혁신을 방해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인구 감소와 이공계 기피 현상의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미국은 한국, 중국, 인도에서 유입되는 우수한 인력들이 꾸준히 산업으로 흡수됐다. 또 정부는 SRC(반도체 기업 간 출자로 만들어진 연구회사)를 중심으로 산업계와 함께 반도체 소자를 연구하는 센터를 만들어 한 해 1000억원 이상의 자금을 대학에 투자해 소자 연구를 이끌어가고 있다. 미래 소자 연구는 특정 기업에 이득이 되는 것일 뿐 아니라 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정부의 투자가 꼭 필요한 분야다. 이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고유전율유전체, 핀펫(FinFET), 화합물채널 등 핵심적인 소자 원천기술 연구 및 고급 인력 양성이 동시에 이뤄졌다.
우리나라는 지난 30년간 최고의 인재가 반도체 산업에 공급되며 지금의 위상에 올랐다.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변신해야 하는 현 시점은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일본의 전철을 밟느냐, 아니면 미국의 길로 가느냐를 좌우할 것이다.
관건은 미래 소자 연구를 위한 산업 생태계 구축과 우수한 인력의 지속적인 유입이다. 최근 인구 감소와 함께 소자 공정 쪽에서 인력의 질 저하가 심심찮게 거론된다. 또 연구비 부족으로 인한 반도체 연구 기피현상으로 소자 연구 시스템이 취약해지고 있는 상황은 우려스럽다. 특히 차세대 소자 공정 원천기술의 핵심이 되는 장비 및 부품소재 산업에 대한 국가적인 관심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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