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2월 1일. 삼성이 중대 발표를 한다는 소식에 기자들이 속속 회견 장소에 들어섰다. `혹시 64K D램이 아닐까?` `설마, 시작한 지 6개월밖에 안 됐는데…`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강진구 삼성반도체통신(1988년 삼성전자와 합병) 사장이 환한 얼굴로 보도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삼성반도체통신이 64K D램을 개발했습니다. 불과 6개월 만에 생산, 조립, 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벽하게 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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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삼성반도체통신이 개발한 64K D램 모듈.

삼성의 64K D램 개발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반도체 업계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10년 이상 뒤져 있던 우리나라 반도체 기술 수준을 6년 이상 앞당긴 쾌거였다. 특히 메모리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 반도체 신화의 `화려한 서막(序幕)`이었다.

◇삼성, 반도체 사업에 미래를 걸다=삼성은 1983년 3월, 그룹 차원에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다는 선언문을 전격 발표했다. 이는 한 달여 전 이병철 회장이 구체화한 `도쿄(東京) 구상`의 첫걸음이었다.

삼성은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에서 △천연 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의 한계 △교육 수준이 높고 근면하고 성실한 인적 자원 △보호무역주의 강화에 의한 성장 정체 등을 적시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인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했다. 또 반도체가 파급 효과가 큰 기술 집약적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점에서 꼭 필요하며, 우리 민족의 정신력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을 둘러싼 외부 환경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룹 내부는 물론이고 국내외 경쟁사들의 시선도 삼성의 결정에 회의적인 전망을 내놓기 일쑤였다.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최첨단 산업인 반도체는 위험하다` `3년 안에 실패할 것`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일본 미쓰비스연구소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삼성 반도체 사업 불가론을 내놨다.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 △취약한 관련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삼성전자의 열악한 규모 △빈약한 기술 등이 이유였다. 그 당시에는 어느 것 하나 타당해 보이는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삼성은 1년도 안 돼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D램 생산 결정=삼성은 반도체 사업 시작과 함께 `소품종 대량생산`에 적합한 메모리 시장에 진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규모 투자를 앞두고 D램을 포함해 어떤 제품(S램, EP롬, EEP롬 등)을 핵심 제품으로 할 것인지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D램은 수요가 가장 많고 표준화된 제품으로 삼성전자에 적합했지만, 경쟁사가 많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미 미국과 일본에 9개의 경쟁사가 존재하고 있었고, 앞서 256K D램을 개발한 업체도 4개나 됐다. 하지만 이 같은 분석에도 불구하고 `D램을 하지 않는 것은 싸워 보기도 전에 항복하는 것`이라는 내부 의견을 토대로 삼성은 그해 5월 D램 개발에 착수한다.

◇64㎞ `무박 2일` 행군에 담긴 의지=1983년 당시 D램은 반도체의 원조 미국과 일본 업체들만 생산하고 있을 정도로 기술 장벽이 높았다. 시계, TV 등에 들어가는 단순 칩만을 생산하고 있던 삼성의 기술과 장비로는 어림없는 도전이었다. 또 어느 누구도 삼성이 64K D램을 개발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당시 한 개발팀원은 `마치 자전거를 만드는 철공소에 초음속 항공기를 만들라는 주문처럼 무모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삼성은 선진 업체 연수 과정에서 후발 주자로서 겪었던 갖은 모욕과 차별 속에서도 자력으로 공정 개발을 추진했다. 총 309개에 달하는 공정 개발은 무수한 시행 착오를 겪는 등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삼성은 64K D램 개발에 반드시 성공한다는 의지로 107명의 개발 인력 전원이 무박 2일에 걸쳐 64㎞를 행군하며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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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K D램 해외 첫 수출

◇“만세!” 드디어 64K D램 개발=삼성은 1983년 11월 드디어 309개 공정을 자력으로 개발하고 웨이퍼를 생산 라인에 투입했다. 마침내 목표 수율에 도달한 순간, 모든 개발 인력들은 실험실에서 뛰쳐나와 “만세”를 외치며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6개월간 합숙하다시피 하며 노력한 결실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삼성의 64K D램 개발 소식은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D램 사업 진출을 고민하던 국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본 언론도 `충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반신반의하는 언론도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6개월 만에 주력 D램을 개발했다는 소식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심각하게 반응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초고밀도집적회로(VLSI)를 생산하는 국가가 됐다. 또 미국, 일본 등에 10년 이상 뒤처졌던 기술 격차를 6개월 만에 3~4년으로 단축했다. 특히 64K D램 개발은 자체 기술 개발을 기반으로 완전한 기술 독립을 이루고,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는 바탕이 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출발점으로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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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

◆ 김광호 삼성반도체통신 반도체사업본부장(전 삼성전관 회장)

1983년 삼성반도체통신 반도체사업본부장으로 64K D램 개발 현장을 지켰던 김광호 전 삼성전관(현 삼성SDI) 회장은 아직도 당시의 감격을 잊지 않고 있다.

김 전 회장은 “64K D램 개발은 삼성이라는 회사가 첨단 기술을 갖춘 업체로 국내외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이라며 “개발 발표 이후 재고로 쌓여 있던 삼성 전화기가 동이 날 정도로 관련 사업에 주는 파급 효과가 엄청났다”고 회고했다. 또 “개발을 모두 마치고도 미국, 일본 등 경쟁 업체의 견제를 우려해 발표 시기를 늦추기도 했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삼성은 64K D램 개발 이후 연구개발은 물론이고 적극적인 양산 투자를 통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발 과정에서 겪었던 시련도 만만치 않았다.

삼성반도체통신은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기초적인 D램 기술 자료를 이전받고, 개발 인력들의 현지 연수 등을 지원하는 계약에 따라 단계적으로 개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미국으로 연수를 갔던 직원들이 현지에서 멱살까지 잡히며 연수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수모를 당했다. 처음 연수를 갔던 직원 중 한 명은 현지 컴퓨터 시스템을 잘못 조작해 쫓겨나기도 했다. 당시 마이크론은 연수 중인 삼성 직원들에게 어떤 시스템도 만지지 말 것을 지시했다. 사실상 눈으로만 보라는 얘기였다.

이런 시련들은 결국 삼성이 핵심 공정을 자체 개발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고 기술 자립을 일구는 토대가 됐다. 김 회장은 “D램 기술 이전 및 개발 지원을 위해 접촉했던 미국 등의 선진 업체들은 어느 누구도 기술을 주려 하지 않았다”며 “마이크론과 64K D램 기술 도입 계약을 하고 본격적으로 연구에 나섰지만, 현지 연수를 간 직원들이 공정 및 설계실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는 등 무시당하기 일쑤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런 시련들은 삼성 반도체 사업이 기반이 탄탄해지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기초적인 비메모리를 생산하고 있던 부천공장 라인에 D램 설비를 들여놓고 연구를 하고, 클린룸도 개념만 가지고 자체적으로 만들어냈다.

김 전 회장은 “일본 업체로부터 전해 들은 클린룸의 개념(버티컬 플로)만 가지고 경험도 없는 국내 건설 업체들과 무조건 만들어냈다”며 “이런 노력들을 통해 설비, 공정, 건설 등을 망라해 국내 관련 산업 저변이 넓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반도체를 비롯한 국내 전자산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회장은 “국내 전자 산업 초창기에는 어떻게든 해낸다는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며 자기 자리를 지킨 사람들이 대접받는 시대였다”며 “앞으로도 창의적이고 젊은 인재들이 반도체 산업에 많이 유입될 수 있도록 성공 사례를 만들고 적절한 보상을 해 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장비, 부품소재를 포함한 협력 업체들과 진정한 상생 협력 노력을 지속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양종석기자 jsy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