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초. 소니 게임기의 신화인 `플레이스테이션`을 만들어 낸 구다라기 켄 부사장이 삼성전자 LCD 천안 사업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소니는 TV용 LCD 패널의 합작 생산을 제안했다. 한일 양국 간판 기업의 `역사적 합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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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년 후인 2004년 4월 26일, 삼성과 소니는 합작사인 `S LCD`를 설립했다. S는 삼성과 소니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두 회사 가운데 어느 하나를 앞세우지 않는다는 의미도 내포했다.
두 회사가 손을 맞잡은 것 자체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때만 해도 소니는 글로벌 TV의 절대 강자였고, 삼성전자는 디스플레이에서는 강자였지만 TV 사업에서는 성장형 기업이었다. 전통적 역사관에서도 한일 대표기업 간 협력은 이례적인 일이었고, TV 사업을 놓고 경쟁하던 두 회사가 손을 잡는다는 것도 신선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30인치급 LCD 양산도 본격화되지 않은 시기였다. 세기의 결합을 통해 40인치, 46인치 디스플레이 투자가 확정되는 순간으로 기억된다.
합작사 설립 발표 후, 일본에서는 연일 삼성전자와 소니 제휴효과 분석기사가 쏟아졌다. 대부분은 일본의 자존심인 소니가 한국의 후발 기업과 제휴한 것이 안타깝다는 분위기였다. 국내에서도 실익이 있다거나, 둘 사이 향후 미묘한 관계가 있다는 식의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두 회사의 결합으로 영상기기에서 소니의 브랜드 파워와 삼성 LCD의 기술력이 결합한 것은 분명했다. 당시 소니는 LCD 패널의 안정적 확보와 조달 비용 절감이 화두였던 시기다. 삼성전자는 최대 구매기업을 확보하면서 디스플레이 기술력을 대외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당시 구다라기 소니 부사장은 “LCD를 가장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기업은 삼성전자”라는 짧은 말로 난무하는 여러 가지 추측에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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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충청남도 아산에서 역사적 기념식이 열렸다. 자리에는 윤종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데이 노부유키 소니 회장까지 직접 참석했다. 1년 뒤인 2005년 4월 세계 최대 7세대 LCD 생산라인(7-1 라인)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다.
이는 두 회사의 역사는 물론이고 전자산업, TV업계, LCD 시장에도 큰 변곡점이 된다. 합작법인 S LCD는 가동 6개월 만에 생산 능력을 두 배로 늘렸고 LCD TV 시장에서 40인치, 46인치의 업계 표준화를 주도하게 된다.
LCD TV가 판매되기 시작한 2000년 초만 해도 LCD TV 강자는 시장의 20%를 점유하고 있는 샤프였다. 당시 삼성전자와 소니의 점유율은 10% 안팎에 불과했다. 그러나 S LCD 7세대 라인이 가동되면서 삼성전자와 소니는 안정적 패널 확보를 기반으로 평판TV 시장에서 점유율을 가파르게 올릴 수 있게 된다. 당시 삼성전자는 `보르도TV`, 소니는 `브라비아TV`라는 인기 모델로 TV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소니는 S LCD를 통해 세계 대형 LCD TV시장의 40%대에 오르게 된다. 삼성전자 역시 단순히 디스플레이 업체를 뛰어넘게 된다. 현재 7년 연속 글로벌 TV 1위에 도전하는 삼성 TV의 고공행진은 2000년대 중반 S LCD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분석이 많다.
7세대에서 `협업의 힘`을 경험한 삼성전자와 소니는 2006년 8세대 합작계약을 체결하고 투자를 확대한다. 당시 8세대 투자에는 불확실성을 지적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두 업체는 초대형 LCD 패널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과감한 결정을 했다. 이를 계기로 50인치급 LCD TV와 초대형 LCD 시장의 표준화를 선도하면서 지금의 디스플레이 시장이 만들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과만 놓고 보면 삼성전자와 소니의 디스플레이 협력은 삼성전자에 더 큰 이익으로 돌아왔다. 삼성전자는 2007년 이후 TV에서 소니를 제치고 `글로벌 톱`에 오른다. 이후 삼성전자는 현재까지 TV시장의 최강으로 확실한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애초 소니가 삼성전자와 S LCD를 설립했던 것은 세계 1위 TV 제조업체로서 안정적이고 품질이 좋은 LCD 패널을 조달받자는 목적이 강했다. 하지만 합작 후 불과 몇 년 만에 소니 TV사업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후 세계 TV시장을 장악한 것은 공교롭게도 협력 파트너인 삼성전자였다. 삼성은 소니라는 안정적 수요처를 바탕으로 LCD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한편, 자사 TV사업의 강화까지 이끌어냈다.
현재 소니는 TV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물론이고 LG전자에도 뒤지면서 TV부문 3~6위권 업체로 밀려났다. TV사업이 오랜 적자를 겪으면서 사업 구조조정 이야기도 끊이지 않고 나오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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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대표기업 간 결합은 결국 2011년 말 끝이 난다. 삼성전자가 소니가 가진 S LCD 지분 전량(3억89999만주, 1조800억원 규모)을 인수한 것이다.
두 회사 간 결별의 가장 큰 이유는 소니의 TV사업 추락이다. TV 판매가 줄면서 소니는 S LCD의 물량을 소화하기 어렵게 됐다. 지분 50%를 가진 소니는 LCD 생산량의 절반을 우선 구매할 권리가 있지만 점점 필요 물량이 줄어들게 됐다. 결국 TV사업의 연이은 적자로 소니는 구조조정에 더 집중하게 되면서 두 회사 간 결별이 단행됐다.
삼성전자와 소니는 최종 지분까지 정리했지만 전략적 협력관계는 유지하겠다는 방침이다. 삼성이 지분 전량을 갖게 됐지만 소니와 LCD 물량 공급과 기술적 협력 관계는 계속 이어간다는 것이다.
삼성의 디스플레이 사업은 소니와의 결별 이후 또다시 변화를 겪게 된다. 2012년 7월 삼성전자 LCD사업부와 S LCD,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SMD)가 합쳐져 삼성디스플레이라는 새로운 회사가 출범했다. LCD를 넘어 모바일 부문까지 포함한 삼성만의 종합 디스플레이 전문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세기의 결합으로 불렸던 삼성과 소니의 LCD 합작은 채 10년이 못 가 끝이 났지만, 두 회사 합작사는 대형 LCD 확산이라는 디스플레이 산업 변화를 주도했다”고 말했다.
김승규기자 seu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