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위나라를 토벌하러 떠나는 날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출사표(出師表)`를 올린다. “신(臣)은 본래 남양(南陽)에서 밭이나 갈던 농민으로 난세에 그럭저럭 목숨이나 부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선제(先帝) 유비께서 신의 비천함을 꺼리지 않으시고 몸소 지체를 낮추어 세 번이나 초가집에 왕림하시어 천하대사를 물으셨습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일화를 담은 출사표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제갈량의 출사표는 나라에 대한 충성과 백성을 걱정하는 정성이 구구절절 배어 있다. “선제께서는 대업을 창업하여 절반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이에 한(漢)의 황실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길입니다.” 제갈량이 늙은 몸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출사표를 읽고 울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고 한다. 출사표가 삼국지뿐만 아니라 고금(古今)의 명문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옛날부터 전쟁은 나라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였다. 병사를 지휘하는 장수는 신하로서 각오를 적어 스스로 다짐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 그 뜻을 분명히 해야 했다. 출사표가 가진 의미다. 전쟁뿐 아니라 스포츠나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출사표는 곧잘 인용된다. 2012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금메달을 목표로 “후회 없이 싸우고 돌아오겠다”고 다짐한다. 기업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도 출사표를 던졌다고 말한다.
이런 출사표가 전성시대를 맞았다. 언론에는 거의 매일 출사표가 끊이지 않는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다. 새누리당은 박근혜·김문수·김태호 등 5명이 나섰다. 민주통합당도 문재인·손학규·김두관 등 예비경선 후보 8명 모두가 출사표를 던졌다. 유력 대선 주자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도 TV와 책에서 “정말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신념과 판단에 따라 자기가 행복해지는 선택을 해야 한다”며 “도전은 힘이 들 뿐 무서운 것이 아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국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애정 표현만큼은 정치권 역시 만만치 않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사표를 던진 대선 예비주자들은 하나같이 `국민 행복과 나라 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미사여구로 가득한 출마의 변과 달콤한 공약도 늘어놓았다. 약속대로만 된다면 대한민국은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글로벌 경제 위기로 국민은 기진맥진이다. 일자리가 없는 젊은이들은 절망하며, 조기 퇴직에 내몰린 베이비붐 세대는 사표 던질 시기만 기다린다.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릴 때 촉나라도 벼랑 끝 위기였다. 유비가 죽고 어린 아들 유선이 즉위해 앞날이 막막했다. 강력한 위나라 군대가 촉을 압박해오는데, 관우와 장비 같은 용맹한 장수는 죽고 없었다. 이미 승리하기 힘든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출사표를 올린다. 결국, 여섯 차례나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적의 방어를 깨트리지 못했다. 오장원에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출사표에 담긴 유비와 제갈량의 오랜 염원도 물거품이 된다.
출사표는 승리의 욕심과 자만의 표현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두려움을 떨치고 결연한 마음으로 던져야 한다. “신은 사명을 받은 날부터 자리에 누워도 편안할 수 없었고, 밥을 먹어도 맛을 알 수 없었습니다. 신은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할 것입니다.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승산 없는 싸움에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운명을 걸 각오로 제갈량이 피를 섞어 쓴 글이 출사표다. 그래서 비장하고 아름답다.
주상돈 벤처경제총괄 부국장 sd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