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명박 정부에 인물 가난이 들긴 들었다.” 이계철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후보자의 나이(72세)와 이력에 대한 즉흥적 반응이었다. 누구도 `최시중 후임 이계철`을 쉬 예상하지 못한 탓에 `인물가난`이 신경질적으로 솟은 측면도 있다.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이 이리저리 돌아다닌 건 당연했다. 본디 규제를 하는 자리라 관심이 많기도 하거니와 그가 정보통신 정책 꼭짓점(정보통신부 차관)에서 내려온 지 16년이나 지났기 때문이다. 최시중 전 위원장이 남긴 임기가 2014년 3월 25일까지 2년 1개월이어서 후임의 맡은 바가 중요한 때다. 그가 어찌 움직이느냐에 따라 방통위 존폐는 물론이고 한국 방송·정보통신 정책이 진퇴하리라.
계. 계보 속에 뜻을 모으는 경향이 강한 관가에서 행정고등고시 5회(1967년)는 왜소했다. 이계철 후보자를 포함한 동기가 서른하나였다. 쉰넷 4회에 눌리고 마흔여덟 6회에 치받혔다.
머릿수만 적은 게 아니었다. 김양배·김용진·이원종·전윤철·강봉균·이헌재·정정길 등 쟁쟁한 선후배 장관들에 밀려났다. 김성순·심대평·최인기·현명관·박운서·이해봉처럼 기세등등한 선후배 정치·기업인도 많았다. 1994년 말엔 이석채 재정경제부 차관, 한이헌 청와대 경제수석 등 7회까지 머리를 들었다. 5회엔 장관과 정치인이 드물었다. 문희갑 12·13대 국회의원과 장인기 법원행정처장(장관급) 등을 꼽고 나면 손가락이 허전하다. 5회에게 이계철 후보자의 방통위 등극 여부가 특별할 이유다.
철. `철저한 자기 관리`는 이계철 인물평에 자주 등장한다. 청백리로 회자됐다. “글쎄, 차도 없더라. (방통위원장 후보자 신분이라) 관용차를 쓸 수 없어 분당에서 광화문까지 계속 대중교통으로 출근하는 바람에 의전도 헝클어졌다”는 푸념이 들릴 지경이다. 도덕성 시비에 시달려 낙마하곤 하는 인사청문회를 그가 가볍게 통과하리라는 예측이 이어졌다.
갑자기 야당 쪽이 의문을 제기했다. 2006년 7월부터 4년간 글로발테크에 비상근 고문으로 재직할 때 `KTF 이동통신 중계기 뒷돈 파문`에 관여했다는 의혹이다. 글로발테크에 재직하면서 업무상 관련 있는 기관인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의 이사장을 겸직하며 고문료를 받은 게 문제였다. 이 과정과 타당성을 분명하고 자세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뜩이나 방통위는 최시중 위원장과 정용욱 정책보좌역을 둘러싼 `돈 봉투` 의혹에 휘말린 상태다. 이계철 후보자의 티끌이 조직에 연타를 가할 큰 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이런저런 의혹을 매끈하게 떨어내야 할 이유다.
“이… 계에… 처얼!” 그가 그렇게 무대로 불려 나왔다. 흉중이 몹시 궁금하다. 방송계 염원인 `방통위의 독립적 운영`을 보장할까. 통신계 바람인 정보통신기술(ICT) 진흥 묘수를 내놓을까.
이은용 논설위원 ey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