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통신회담(13)
1997년 3월 13일.
서울 정보통신부 회의실에서 한미통신협의가 이틀 일정으로 열렸다. 그 전해인 1996년 7월 16일, 미국이 한국을 통신분야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지정한 이후 4번째 회의였다.
회의를 앞두고 그해 2월 정부는 정홍식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데이콤 부회장 역임) 주관으로 관계부처 국장회의를 열어 대응전략을 논의했다.
정홍식 실장의 증언.
“미국 측 요구 중 수용불가 항목을 구분했습니다. 우리는 미국통신무역법에 근거한 협정체결은 불가능하며 합의형식도 연례점검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본방침이었습니다.”(한국IT정책20년에서)
그동안 미국 측은 민간통신사업자 장비 구매 시 한국정부가 간여하지 말 것과 이를 보장하는 협정체결을 요구해 왔다. 한국은 민간기업 통신장비 구매행위에 간섭할 수 없고 간섭한 적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양측은 1996년 12월 19일 끝난 협상에서 문서로 협정체결 대신 한국이 미국 측 요구를 담은 정책 발표안을 정보통신부 회보에 게재하는 것으로 큰 틀에서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다.
회의에는 한국 측에서 정통부 이교용 국제협력국장(정보통신정책실장. 우정사업본부장.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 부회장 역임. 현 한국우취연합회장)이, 미국 측은 션 머피 미USTR 아·태통신담당국장이 각각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한국대표단은 정통부 설정선 협력기획담당관(방통위 방송통신융합정책실장 역임. 현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 부회장)과 유관부처 관계자, 정현철 정통부 사무관(현 국립전파연구원 전파자원기획과장) 등이었다.
한미 양국은 발표형식과 내용을 놓고 막바지 신경전을 벌였다. 미국 측은 정책발표문을 대국민발표를 통해 미국 측 입장을 천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국 측은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특정 업계 일을 가지고 정부가 어떻게 국민을 대상으로 발표를 할 수 있느냐. 당초대로 회보에 게제하자”며 거부했다.
이교용 국장의 회고.
“미국 측은 대국민 발표가 어렵다면 관보에 게재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측에 ‘관보는 국민 전체 삶과 직결된 법령이나 정부시책을 널리 알리는 수단이다. 그 내용은 헌법 개정이나 각종 법령, 고시(告示), 예산, 조약, 서임(敍任), 사령(辭令), 국회 사항 등인데 특정 산업에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어떻게 관보에 실을 수 있느냐’며 거부했어요. 한국 측은 시종일관 정통부 회보에 게재하는 안을 주장했습니다.”
양측은 게재방식과 내용을 타결 짓지 못하고 다음 회의에서 최종 결론을 내기로 했다.
그해 6월 17일과 18일 이틀간 한미 양국은 미국 워싱턴DC USTR회의실에서 5차 통신협의회를 열었다. 이번 회의는 미국이 지정한 PFC와 관련해 협상기한인 7월 26일을 앞두고 있어 양측은 어떤 형태로든 결말을 내야 할 입장이었다. 지난 2년 가까이 끌어온 세계무역기구(WTO) 통신협상도 그해 2월 15일 최종 타결된 상태였다.
한국은 협의회 전에 각부처간 협의를 거쳐 최종 협상안을 만들었다. 합의 안 된 사안은 빈칸으로 남겨 놓았다. 이 작업은 설정선 담당관이 맡았다.
협의회에는 한국 측에서 이교용 정통부 국제협력국장이, 미국에서는 션 머피 무역대표부(USTR) 통신담당관이 각각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양국은 당초 이틀간 회의를 열기로 했으나 이견을 해소하지 못해 일정을 하루 연장해 19일까지 마라톤협의를 계속했다.
한미 양측은 조율 끝에 정책발표문은 한국 측 주장대로 정보통신부 회보에 게재하고 회보와 별도로 미국 측이 희망하는 재정경제원과 통상산업부 등 관련부처와 통신사업자, 통신장비제조업체 등에 회보 내용을 추가 배부하기로 합의했다. 양국 주장을 절충한 안이었다.
미국 측은 “정책발표문이라는 형식을 미국 측이 받아들인 만큼 한국정부가 민간기업의 자율적 구매를 보장해 주고 민간사업자는 가격과 품질 등 상업적 고려에 따라 장비를 구매하는 것을 보장하는 내용을 포함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국 측은 이에 대해 “민간사업자는 자신의 상업적 고려에 의해 장비를 구매하고 있으며 그런 요구는 정부 불간섭을 주장한 미국 측 입장과도 배치되는 것”이라며 거부했다. 양측의 줄다리기 끝에 한국 측 주장대로 ‘정부가 민간사업자의 장비구매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통보 서한을 놓고도 양측은 이견을 보였다. 미국 측은 정책발표문에 주미 대사가 서명한 서한을 미국 USTR대표 앞으로 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 측이 답신을 보내 올 경우 미국 측이 이를 협정이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었다. 한국 측은 수석대표명의 서한을 보내는 안을 제시했다. 미국 측은 한국 측 주장을 수용해 이 문제도 타결됐다.
통신사업자의 외국인 지분참여 한도는 당초 한국 측이 33%를 제시했으나 이를 49%로 확대했다. 이는 WTO양허안에서 한국이 2000년부터 국내 통신사업에 참여하는 외국인 지분한도를 49%로 확대하겠다는 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51%를 요구했다.
이교용 국장의 말.
“미국 측은 2% 차이인데 한국이 왜 그렇게 강경한 입장이냐고 했어요. 미국 측에 ‘한국 입장에서는 2%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큰 문제다’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했어요. 이미 WTO양허안에서 49%로 한 상태여서 미국 측도 더 이상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측은 한국 업체들이 미국산 통신기기를 수입하면서 과도한 기술이전을 요구하는 등 한국업체가 자율적으로 정한 기술규격 내용이 너무 세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완화해줄 것도 요구했다. 사실상 기술이전 요구 금지 요구나 같아 한국 측은 절대 수용할 수 없었다. 결국 ‘기술이전은 상업적 고려에 따라 독자적으로 외국기업과 협의한다’는 원칙만 발표문에 넣기로 했다.
이교용 국장의 설명.
“한국 측은 작은 일도 꼼꼼하게 국가이익을 따졌습니다. 막판에 회사(Corporation)를 미국은 복수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회사와 회사들의 차이인데 외교부에 타당한지를 문의했습니다. 외교부에서 대세에 지장이 없다고 해서 양해를 했습니다.”
이 국장은 막판 타결을 앞두고 미국 측이 시간을 끌며 억지주장을 하자 한국 측 최종안을 미국 측에 제시하면서 ‘이게 마지막 카드다. 미국 측이 안 받으면 나는 회담을 그만 두고 가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강봉균 정보통신부장관(재경부장관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한테 전화로 그런 사실을 보고했다. 강 장관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이 국장,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소신껏 하시오.”
이 국장의 강경자세에 미국 측 대표는 당황해 하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바세프스티 대표가 출장 중이라 결과를 보고하지 못했으니 승낙을 받을 때까지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 국장은 이도 거부했다.
“회의장을 나가면 기자들이 협상결과를 물을 텐데 ‘타결’아니면 ‘결렬’아니냐. 어떻게 할지 당신이 결정하라.”
그 결과 나온 최종 절충안이 ‘잠정타결’로 발표하기로 했다.
한미통신회담은 다른 회담과 달리 정통부측 수석대표가 전권을 행사했다. 외무부나 재경부 등과 부처 간 협의를 해 입장을 조율했으나 항상 정통부 안대로 협상을 진행했다.
이교용 국장의 말.
“당시 외무부 이태식 국장(주미대사 역임)도 모든 일을 수석대표에 일임했어요. 그러다보니 회담에 임하는 한국 측 대표는 소신을 갖고 당당하게 회담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회담이 한국 측 입장을 반영해 타결되자 미국 측 통역을 담당했던 한국계 인사가 이 국장을 찾아왔다. 당시 60세가량 돼 보였다.
그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다른 회담은 미국 측에 끌려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통신회담만은 한국이 주도권을 갖고 논리적으로 미국을 설득해 타결했다”면서 “아주 인상적인 회담이었다”고 말했다.
한미 양국은 민간사업자 장비구매원칙 등을 한국 정통부 회보에 게재하고 미국은 정통부 회보 사본을 전달받는 즉시 한국 정부에 대해 취했던 통신 분야 PFC 지정을 해제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정통부는 그해 7월 14일 회보에 한미 통신협상 협의사항과 WTO(세계무역기구)기본통신협정, 정보기술협정(ITA) 체결에 따라 한국 정보통신업계가 유념해야할 사항과 한미 간에 최대 쟁점이었던 민간사업자 장비구매 문제는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제17조 내용을 발췌해 “민간사업자는 오직 자신의 상업적 고려에 의거해 장비를 구매한다”고 명시했다.
정통부는 장비구매자가 공급업자로부터 통신장비를 구매하거나 임대할 때 과도한 고유정보 요구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을 비롯해 전기통신기자재 형식승인 간소화, 지적재산권 보호 강화 등도 포함했다.
한미통신협상 타결이 갖는 의미는 미국 측을 설득해 한국 측 주장인 ‘정책발표방식’을 관철시켰다는 점이다. 한국 측 대표단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해 미국 대표단이 미국 내 산업체를 설득할 명분을 제공했다. 이석채 장관(현KT회장)이나 강봉균 장관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외압의 바람막이가 돼주겠다”며 수석대표 의견을 수용해 대표단이 소신껏 회담하도록 힘을 실어줬다.
그해 7월 23일.
미 USTR은 이날 한미 간 통신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한국을 8월 11일자로 PFC에서 제외한다고 관보를 통해 발표했다. 샬린 바셰프스키 USTR대표는 이날 발표를 통해 “한국은 정보기술품목에 대한 관세를 오는 2000년까지, 부가품목에 대한 관세를 2004년까지 각각 철폐하고 내년 1월 1일부터 통신서비스회사 외국인 소유제한을 완화키로 했다”고 밝혔다.
USTR은 한국이 정보통신 분야 관세철폐와 시장접근 개선, 경쟁촉진 및 투명성 보장 등 조치를 취함에 따라 지난해 7월 26일 단행된 PFC 지정을 해제한다고 밝혔다.
길고 험난한 10년간에 걸친 미국과의 통신회담은 상호 이해를 조정하면서 한미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기술과 산업 등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 통신회담 타결은 칙칙한 그림자가 아닌 찬란한 빛이 됐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