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통신회담 <11>
1996년 3월말.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 장관실. 미국워싱턴에서 한통의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를 든 이석채 장관(현 KT회장)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아니 갑자기 그런 요구를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회의 중단하고 돌아오세요.”
수화기속 너머는 정보통신부 강상훈 정보통신협력국장((청와대정보통신비서관, 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 앤씨소프트 감사 역임)이었다. 그는 한미통신회의에 한국 측 수석대표로 미국 위싱턴 DC 미 무역대표부(USTR)회의실에서 회의 중이었다. 강 국장은 미국 요구 내용을 보고하면서 이 장관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미국 측은 합의사항 이행 점검외에 추가로 기존 협정을 개정하자고 요구했다. 이 장관은 미국의 무례한 요구에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미 간 통신협의 기상도가 시계(視界) 제로로 접어 드는 순간이었다. 한미 간 통신회의는 그해 3월 26일부터 4월 2일까지 미국 워싱턴DC 미 무역대표부(USTR)회의실에서 열렸다.
한국은 강상훈 정보통신협력국장을 수석대표로, 미국은 크리스티나 런드 미USTR 부대표보가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미국은 회의에서 기존 합의사항 이해점검 이외에 두 가지를 더 요구했다. 요구 사항은 △그해 6월로 예정된 신규통신사업자 허가계획과 관련, 미국 통신장비체들이 한국업체와 동등한 조건으로 신규시장에 참여할 수 있게 보장해 줄 것 △지난 1992년 체결된 한미통신협정을 개정, 신규 사항들을 포함해 이를 명문화할 것 등이었다.
강상훈 국장은 이에 대해 “이번 협상이 정부조달시장 상호개방 등에 관한 협정 이행사항을 점검하기 위한 자리이므로 양국 통신협정 개정문제는 협의대상이 되지 못한다”라며 미국 측 요구를 거부했다.
당초 통신회의 일정은 2일간이었다. 하지만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기간을 5일 연장했다. 양측은 회의기간 내내 타결점을 모색했으나 한국 측 반대에 부딪쳐 접점을 찾지 못하고 회의를 종료했다. 다만 기존 통신협정 이행에 관한 사항을 명확히 하는 수준에서 합의문을 작성하고 추가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키로 합의했다.
그해 4월3일.
미 USTR은 연례 88통상법 1377조 통신협정 이행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 측은 한국정부가 △미국 기업에 과도한 형식승인 요구 △영업비밀 보호 미흡 등을 들면서 이동통신시장도 전면 개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해 7월 1일까지 통신협정 이행 및 개정 문제를 지켜본 후 한국의 통신협정 이행여부에 대해 재판정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전방위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미국의 일방적인 발표에 한국은 크게 반발했다.
이석채 정보통신부장관은 그해 4월24일 미 USTR 대표에게 미국 조치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 장관은 사전에 통상전문가인 김석한 변호사(현 미 워싱턴 애킨검프 법률회사 시니어 파트너) 등의 자문을 구했다. 미국에 대해 보복조치를 걸어 WTO(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한다는 역보복수단도 강구해 놓았다
이 장관의 회고.“정부안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당시 통신장비는 반도체나 철강 등에 비하면 수출액이 얼마 안됐습니다. 한미 간 무역분쟁이 발생하면 다른 수출에 엄청난 타결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였어요. 주미한국대사관에서 더 아우성이었어요. 박건우 주미대사(외무부차관, 경희사어버대총장 역임, 작고)가 구본영 청와대경제수석(과학기술처 장관 역임, 작고)에게 우려 편지까지 보냈어요.”
이 장관의 계속된 증언.
“미 대사관을 통해 ‘왜 미국이 시장규모가 얼마 안되는 통신분야를 가지고 시비를 거느냐’고 알아 봤어요. 그랬더니 한국시장의 60%를 주면 가만히 있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국가 통신정책이 있는데 시장의 얼마를 달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건 미래를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이 장관은 항의서한에서 “미국이 한국의 통신협정 이행여부에 대해 7월1일 재판정키로 한 것은 일방적 결정이며 지난 4월2일 한미양국 합의를 위반하는 것이므로 수용할 수 없다”면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제재조치를 취하면 한국도 대응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강경 입장을 전달했다.
이와 관련한 뒷이야기 하나.
이 장관의 강경입장에 대해 바세프스키 대표서리는 사석(私席)에서 “이 장관이 박필수 전 상공장관(외국어대 총장 역임, 작고)의 전철을 밟거나 아니면 정치적 야심을 갖고 미국에 싸움을 거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 장관은 한미통신마찰로 노태우 정부시절 경질됐다.
그해 5월 6일부터 7일까지 이틀간 서울 정통부 회의실에서 한미통신협의가 열렸다.
한국측에서 정통부 강상훈 정보통신협력국장을 수석대표로 정통부, 기획원, 외무부 관계자등 15명의 대표단이, 미국측은 크리스티나 런드 미 USTR부대표보를 수석대표로 국무부, 상무부 관계자등 8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미국은 회의에서 △신규사업자 허가계획과 관련, 투명하고 비차별적인 허가기준 보장 △통신망 동동 접속과 역무간 회게분리 등 공정경쟁제도 수립 △정부 및 정부투자기관의 통신장비 조달뿐 아니라 민간기업의 통신장비 구매에 대한 정부 불간섭 보장 △국산장비 우선구매 권장정책 채택 금지 등을 요구했다. 미국은 지난 92년 체결한 양국 통신협정을 개정, 이같은 내용을 명문화할 것도 거듭 요구했다.
강 국장은 이에 대해 “지난 3월 협상 당시 표명한대로 민간기업인 신규통신사업자의 장비구매는 정부 간 협의대상이 될 수 없다. 기존 협정 이행여부는 4월2일 한미 간 합의로 종결됐다“고 말했다. 한국은 이미 합의한 기존 협정 이행여부를 7월1일 재판정한다는 미국 방침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크리스티나 런드 미USTR 부대표보는 5월 8일 미공보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미통신협상에서 한국이 외국산 통신장비 구매 및 서비스시장 개방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있지 않은데 실망스럽다"면서 한국정부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런드 부대표보는 “통신장비의 구매결정은 경제, 기술적 장점 등 비즈니스적인 관점에 따라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다. 한국정부의 원산지에 따른 구매방식은 자유시장체제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라면서 “한국이 외국기업에 대해 비차별적인 시장접근을 허용해 달라”고 거듭 촉구했다.
양국관계가 냉각되자 5월21일 바세프스키 미USTR부대표가 이석채 장관 앞으로 서한을 보내왔다. 그는 “한미양국 간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6월에 워싱턴에서 협의를 갖자”고 요구해 왔다. 이 무렵 제임스 레이니 주한미국대사도 정통부로 이 장관을 찾아와 타협점을 찾고자 노력했으나 이 장관은 미국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장관은 청와대에 들어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통신협상 대응책을 보고하고 대통령의 결심도 얻어냈다.
이 장관의 말.
“김 대통령에게 ‘통신산업은 기술집약적이어서 한 번 내주면 한국이 회복하기 어렵다’고 보고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당시 미국과 통상갈등을 원하지 않았어요. 김 대통령이 ‘이길 수 있느냐’고 묻길래 ‘싸워 볼만 합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만약 한미간에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면 ‘장관이 책임지고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해 6월13일과 14일 이틀간 미국 워싱턴DC 미USTR 회의실에서 한미통신협의가 열렸다. 한국은 정보통신부 강상훈 정보통신협력국장이, 미국에서는 크리스티나 런드 미USTR 부대표보가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한미양측은 회의에서 미국이 요구한 민간통신사업자 통신장비 구매시 정부 불간섭 보장과 통신기기 관세철폐 등 현안에 대해 집중 논의했다.
미국은 회의에서 한미 간 새 협정체결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한국은 민간사업자 장비구매는 업게 자율에 맡겨야 할 일이므로 정부 간 협정체결은 불가능하다는 기존입장을 고수했다.
그해 6월25일 USTR대표를 역임한 캔터 미상무장관이 한국에 왔다.
이석채 정통부 장관은 이날 캔터 장관과 만나 “민간구매에 정부관여는 간섭하지 않아 정부 간 서면협정 체결을 불가하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캔터 장관은 이에 대해 “한미통신협상에 진전이 없을 경우 한국을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 무역보복을 개시하겠다”고 압박을 가했다.
그해 7월1일 바셰프스키 미 USTR 대표대행은 박건우 주미 한국대사와 만나“한국이 7월15일까지 한미통신협상의 신규협정을 체결하거나 아니면 미국장비의 시장점유율 보장 등 실질적인 진전이 없을 경우 미통상법 1374조에 따라 한국을 우선협상국(PFC)으로 지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미국 입장을 다시 전달했다.
이석채 장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 장관은 “정부는 민간통신사업자에 대한 장비구매에 정부는 간여하지도 않고 있고 간여할 수도 없다. 미국이 제시하는 합리적인 요구는 수용하겠지만 새로운 협정은 체결할 의사는 없다”고 밝혔다.
7월13일 이석채 장관은 바세프스키 미 USTR대표서리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장관은 서한에서 미측이 한국을 PFC로 지정할 경우 한국정부도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 장관은 민간기업의 장비구매는 기업이 결정할 사안으로 정부가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신규 통신시장 내 미국장비 점유율 요구는 민간기업의 장비조달에 한국정부가 관여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미국 입장과도 상치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해 7월23일.
바세프스키 미 USTR 대표서리는 박건우 주미한국대사를 통해 한국이 새로운 협정체결 의사가 없음에 유감을 표시하며 PFC로 지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미간 타협의 여지는 점점 사라졌다. 한미양국은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