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항공·유통·정유 등 대책마련 `부심`
자동차·전자·조선·유통 등은 `반사이익` 기대
(서울=연합뉴스) 산업팀 =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 우려로 지난주 나흘 연속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수입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국내 산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한때 1,116.40원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금요일인 16일 3.90원 내린 1,112.50원으로 마감돼 닷새만에 오름세를 멈췄지만 유럽 재정위기 위험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반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가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태로 빠져든다면 환율이 최고 1천600원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증권가 전망이 잇따라 원자재 수입 비용 증가로 인한 국내 기업들의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18일 산업계에 따르면 수입 원자재를 가공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 제조업체와 외국산 식재료에 의존하는 식품업체, 비행기 기름값 부담이 큰 항공업체, 가격 인하 압박에 시달리는 정유업체들은 환율 급등에 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자동차·전자·조선·유통업계는 원화 가치 하락에 따른 매출 증가로 도리어 반사이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환율급등은 치명타"…비상걸린 기업들 = 보유자금이 넉넉지 않고 환헤지 능력이 부족한 중소 제조업체들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다.
경기도 안양에서 휴대전화 부품 생산 업체를 경영하는 김모(52)씨는 "당장 원자재 가격은 오르는 데 원청기업에서 이를 반영해줄 기색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라며 "이 상태가 몇달만 지속되더라도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해 진다"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최근 설문조사에서 중소기업 37.3%가 `환율 변동에 대해 평소 아무 대비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고 답해 환율 위험에 무방비로 방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건설자재를 수입해 판매하는 중소기업인 이모(47)씨는 "추석을 지내고 나니 환율이 폭등해 있어 곤혹스럽다"며 "차라리 환율이 안정될 때까지 영업을 중단하는 방안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중앙회 관계자는 "매달 중소기업인들을 대상으로 경영애로사항을 조사하면 `원자재 가격 부담`이 수위를 차지하는데 어려움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며 "정부는 환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곡물 원재료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식품업계의 어려움도 이에 못지 않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곡물 원재료를 수입하는 CJ제일제당은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연간 30억여원의 손해를 보게 돼 이번 환율급등 사태에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환율이 달러당 1천600원대까지 치솟았던 2008년 하반기 환차손으로만 2천억원의 손실을 입은 악몽같은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탕 원료인 원당 가격이 5월부터 반등해 2009년 초 파운드당 12~13센트에서 현재 파운드당 30센트 선까지 치솟아 경영 부담을 가중하고 있다.
원당 가격 급등과 환율 문제가 겹치면서 CJ제일제당을 비롯한 제분·제당업체들이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지만 곡물 원재료는 전액 달러로 결제해야 해 마땅한 대응책은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이다.
항공업계는 달러 가치의 상승으로 인한 수입 증가보다 기름값 등 달러로 결제해야 하는 비용 증가가 훨씬 커 이마를 찌푸리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르면 대한항공은 640억여원, 아시아나항공은 76억여원의 연간 손실이 각각 발생할 것으로 전망돼 이들 기업은 환율과 유가 변동을 예의주시하며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정유업계도 환율이 오르면 원유 수입가격도 오르게 돼 경영 부담이 커진다.
최근 국제 석유제품 가격의 큰 변동이 없는 상황에서 국내 정유사의 세전 공급가격이 890원대에서 9월 첫째주 949.65원으로 대폭 상승한 것도 환율 급등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올해 들어 기름값이 계속 오르는 가운데 환율 인상이라는 변수까지 겹치면서 정부의 기름값 인하 압박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정유사들에는 큰 걱정거리다.
하지만 환율이 오르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수출하는 석유제품의 수출 단가가 함께 올라간다는 점에서 수입가격 인상으로 인한 손실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나오고 있다.
SK에너지는 사내에 환관리위원회를 두고 환율 동향을 주시하면서 환헤지상품 가입 등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으며, GS칼텍스 역시 유가 및 환율 관련 리포트와 거래 외국환 은행의 분석을 참고해 국제 유가 및 환관리 전략을 수립 중이다.
◇수출기업·유통업계 "환율 오르면 반사이익 기대" = 중소기업이나 내수중심 기업들과 달리 수출 대기업들은 환율 상승이 오히려 실적 개선의 원동력이 될 수 있어 최근의 환율 급등세가 나쁘지만은 않은 기색이다.
현대기아차는 올해 기준환율을 1천100원으로 잡았으나 최근 환율이 이를 상회하면서 매출도 환율 상승폭에 비례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환율이 10원 오르면 현대차는 매출이 1천200억원 증가하고 기아차는 800억원 가량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는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 관리를 위해 미국, 체코, 인도, 중국, 터키, 러시아 등지에서 생산 공장을 가동해 리스크를 분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현지생산체제를 통해 고품질의 신차 출시로 판매 확대에 나설 계획이다.
해외 선박 수주가 많은 조선업계는 환헤지를 통해 수주 시점에 환율을 고정시키기 때문에 환율 변동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면서 지속적으로 환율이 오르면 앞으로 수주할 선박의 수익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건설업계도 해외 사업장에서 달러와 유로, 현지 화폐를 골고루 사용해 환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다 공사진척 상황에 따라 기성금을 장기간에 걸쳐 나눠받기 때문에 중간에 환율이 오르면 기성금을 원화로 환전할 때 오히려 약간의 환차익이 생길 수도 있다고 전했다.
수출 주력 품목인 전자업계 역시 환율 인상 자체는 가격 경쟁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국내에서 생산한 제품을 해외로 수출할 경우 이익이 더욱 커지기 때문에 국내 제품 수출 비중이 높은 가전업계가 상당한 수혜를 볼 것이라는 예측이다.
다만 반도체와 LCD 등은 달러 거래 비중이 높아 환율 강세에 따른 이익이 크지 않고,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주요 기업들은 원자재와 제조장비를 수입해 완제품을 만드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환율 변동에 따른 영향이 어느정도 자연스럽게 분산되는 측면이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전자업계로서는 환율 상승이 수출에는 유리하지만 원자재 수입은 불리하기 때문에 상쇄되는 측면이 있다"며 "가전제품은 국내 생산이 많아 수출이 다소 유리하지만 대부분 제품을 현지에서 만드는 경우가 많고 통화를 다양하게 사용해 환율 변동에 따른 득실이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화점과 면세점 업계는 환율 급등으로 외국인 등의 소비가 늘어나면 영업에 일정 부분 도움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국외 여행 심리가 위축돼 내국인의 국내 소비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고 일본과 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의 국내 여행과 쇼핑이 늘어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엔화 환율이 급등할 때 일본인의 구매실적이 본점 매출의 10%가량이 된 적도 있었다"고 했고, 국내 면세점업체 관계자도 "10월 1~7일이 중국 국경절 연휴라서 중국인 관광객의 작년 대비 40% 늘어날 것 같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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