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국가 미래를 이끌 인력을 배출하는 핵심으로 국가경쟁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한국 대학은 국가 위상에 걸맞지 않게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대학의 혁신과 패러다임 변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전자신문은 창간 29주년을 맞아 연속기획으로 글로벌 대학을 목표로 애쓰고 있는 대학총장들을 만나 포부와 비전을 들어봤다. <편집자>
“선택과 집중!”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하는 포스텍이 최근 새로운 사령탑을 맞았다.
지난 9일 오후 포스텍 총장실. 김용민 신임총장(58)과 만남은 국내용이 아닌 세계에서 인정받는 연구중심대학으로 우뚝서야 한다는 포스텍 안팎의 기대와 바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김 총장은 포스텍 최초로 외부에서 영입된 케이스다. 그동안 위상은 높아졌지만 포스텍이 글로벌 연구중심대학으로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해외 선진 대학 시스템을 체득하고 산학협력 인재양성에 밝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이사회 판단 때문이다.
김 총장은 인터뷰 내내 수월성과 전문성, 투명성, 혁신적 연구, 상호협력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포스텍은 물론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 이 같은 문화가 확산되지 않으면 글로벌 일류 대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포스텍의 첫 외부인사 총장인데, 소감과 각오는.
▲35년간 과학기술계에 몸담아온 과학자로서 잠재력이 풍부한 포스텍에서 제2의 새로운 기회를 가지게 된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지만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포스텍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들이 세계 대학으로서 초석을 닦는데 헌신하겠다.
-향후 포스텍 운영 방안은.
▲재정이나 인력, 시설 등 현재 포스텍이 보유한 자산만으로는 세계 수준의 대학으로 발전하기에 부족하다. 현재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새로운 자원을 창출해야한다.
포스텍 안팎에서는 연구와 교육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핵심은 수월성(Excellence)이다. 당장 개선하기는 어렵더라도 수월성의 문화가 학내에 정착되어야 하며, 구성원들이 수월성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그래야 기초가 탄탄해진다.
연구비를 N분의 1로 나누는 것은 당장은 좋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학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성과가 좋은 분야는 집중적인 지원을 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교수들은 자신의 연구분야가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수월성에 따라 다른 분야 교수들과 협력해야한다. 성과가 느리더라도 인내를 갖고 수월성과 진실성, 전문성, 투명성, 진정한 협력을 기반으로 학교를 운영할 방침이다.
-수월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학내 구성원들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
▲연구로써 수월성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여기엔 당근과 채찍(캐롯과 스틱)의 적절한 안배가 필요하다.
혁신적 연구활동을 하는 교수들에게는 교육적 포지션과 장학금, 시드머니를 제공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현재의 교수 평가기준이 너무 정량적인 데이터에 의존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예를 들어 교수가 어떤 분야에서 하나의 논문으로도 될 것을 두개로 나눠서 발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논문수를 가지고 교수를 평가하는 잘못된 시스템 때문이다.
앞으로 교수들의 평가시스템을 개선해 자신의 역량을 마음 놓고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연구환경을 만들겠다.
-앞으로 어떤 연구분야를 집중 육성할 것인가.
▲세계 모든 대학들이 정보기술(IT), 나노기술(NT), 생명공학기술(BT), 환경공학기술(ET)에 매달리고 있다.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이 안 돼 있는데 포스텍은 여기서 세부적으로 특화해야한다.
예를 들어 BT분야에서 줄기세포와 항암물질 등 탁월한 성과를 내는 세부분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어떤 세부분야에 중점을 둘지는 혁신적 성과를 낼 분야인지와 중요도를 고려해 종합적으로 결정해야한다. 이 과정에서 교수들은 자기 연구분야가 아니더라도 밀어주는 문화가가 필요하다. 결국 그것이 5년, 10년 뒤면 성과로 나타날 것으로 확신한다.
-연구기술의 사업화에 관한한 전문가로 알고 있다. 국내 기술사업화의 문제점과 활성화 방안은.
▲우리나라는 기술사업화가 힘든 구조적 문제가 있다. 기술사업화를 위한 산학협력의 핵심은 이노베이션인데 국내 기업들은 대학을 하청업체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기업과 대학이 갑과 을의 관계가 된다면 협력을 통한 성과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미국에 있을 때 독일의 지멘스, 일본의 히타치와 협력해 초음파진단기기를 상품화했는데 이는 기업과 대학이 이해와 진정성 있는 상호협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대학의 역할에 대해 기업이 이해하고, 짧은 기간에 성과를 내려고 하는 기업의 생리를 대학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동시에 이뤄져야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혁신적인 연구를 통해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도 선진국의 기술사업화 모델을 경험하고 돌아와 국내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29년간 미국 워싱턴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산학협력을 진행했는데 단기적 관점에서 성과에 치중하다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학기술정책도 마찬가지다.
한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은 단기적이어서는 안 되며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바라봐야한다는 얘기다. 사실 우리나라 과학기술수준은 과거 25년에 비해 엄청난 발전을 했고, 향후 25년 뒤에도 그러한 변화가 예상된다.
이 같은 변화가 지속되기 위해서 정부는 인내와 끈기를 갖고 10년 이후의 미래를 바라보는 과학기술정책을 만들어야한다.
특히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톱다운(Top down)보다는 바텀업(Bottom up) 방식이 중요하다. 연구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플랜이 나올 수 있다. 미국은 국가의 장기적인 과학기술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현장에 있는 연구자들과 다양한 소통을 한다. 우리나라가 배워야할 점이다.
-동반성장과 공생발전이 화두다. 이를 위한 대학의 역할은.
▲중소기업의 성장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중소기업이 튼튼해야 국가 경쟁력이 살아난다. 대기업은 연구에 대한 투자가 비교적 수월하지만 중소기업은 연구개발 역량이 부족해 대학은 기업의 단기적 기술애로를 해소하면서 글로벌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혁신적인 연구기술을 제공해야한다.
대·중소기업간 공생발전도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활성화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대학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 포스텍은 연구와 교육성과를 기업들과 나누기 위해 적극적으로 소통해나갈 방침이다.
-과학자를 꿈꾸는 대학생과 그들의 부모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학생들에게 올바른 인성과 동기를 부여하고,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기초를 닦아주어야 한다. 포스텍에 발을 디딘 학생들은 10년 뒤면 글로벌 리더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현재 시행하고 있는 입학사정관제도는 점수보다 봉사의 경험, 삶에 대한 분명한 목표의식, 창의성을 지난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기능을 하고 있다.
교수들은 포스텍을 믿고 선택한 학생들의 롤모델이 되며, 학생들이 자신의 자질과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야한다.
앞으로 고등학교를 방문하면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예정이다.
<김용민 총장 프로필>
1975년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김 총장은 미 위스콘신대에서 1979년에 석사학위를, 1982년에는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 테뉴어(영년직정년보장)를 받고, 1990년 정교수가 됐다.
워싱턴대 교수로 재직하며 생명공학과와 컴퓨터공학과, 방사선의학과 교수를 겸임하면서 학제간 융합연구를 주도했다. 전자공학과 교수이면서도 1999년부터 8년간 생명공학과 학과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멀티미디어 비디오 영상처리와 의료진단기기, 의료영상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성과를 도출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연구성과를 상용화하는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일본 히타치와 독일 지멘스와의 공동연구를 통해 세계 최초로 초음파진단기를 상품화하기도 했다.
연구성과의 상용화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지난달에는 세계 최대 학술단체인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 산하 의학생명공학회(EMBS)가 주는 ‘모얼락상(Willam J Morlock Award)’을 수상했다. 이 상은 연구결과의 산업화에 탁월한 업적을 거둔 학자에게 주는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이다.
활발한 연구성과로 그는 1996년 43살의 나이로 IEEE펠로로 선임됐으며, 지난 2005년부터 2년간 EMBS 회장을 역임했다. 2003년에는 호암상(공학상)을 받기도 했다.
연구비 유치에도 역량을 발휘했다. 빌 게이츠 재단에서 700억원 등 총 900억원 이상의 기금을 유치해 생명공학빌딩을 세웠다.
미국국립보건원(NIH)으로부터 연간 260억원의 연구비를 유치했다. 그는 연구의 수월성과 학제간 융합연구를 통해 관련학과 교수들이 210개의 지적재산권, 30여개의 회사 창업, 80여건의 기술이전을 이끌어내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포항=정재훈기자 jh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