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학기가 끝났다. 지난 1986년부터 대학에 몸담아왔으니 무려 50학기를 보낸 셈인데, 이상하리만큼 이번만은 가슴이 허전하다. 몇몇 학생들이 보여 준 종강을 아쉬워하는 표정도 기억에 남는다. 왜일까. 서로 정이 들어서? 난 역시 교수가 천직인 까닭에? 글쎄다.
생각해보니 유독 IT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강조했던 지난 학기였다. 디지털기술이 이룩한 신문명, 인터넷이 만들어가는 e-비즈니스, IT가 창조해가는 기업의 장밋빛 미래상만을 논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융합·모바일·스피드·임베디드·클라우드 등의 기술 관점보다는 오히려 개인화·소셜·글로벌과 보안·프라이버시·그린IT 등의 정치사회적 이슈를 화두로 삼았다.
사실은 최근 IT세태에 무기력함을 느끼던 나였다. 특히 스마트폰에 종속된 삶, SNS와 LBS 과열로 나타난 사생활 침해 현상, IT 원전사고와 다를 바 없었던 농협사태 등은 날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난 무능한 정부와 몰지각한 기업, 무책임한 전문가를 비판하며 ‘참 IT정신’을 호소했다. 젊은 세대가 신기술의 정치사회적 영향을 고뇌해야 인류가 발전한다고도 주장했다. 오죽하면 학생들이 나를 IT 아닌 인문학 교수라고 평가했을까.
맞다. 이번 학기가 전과 달랐다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런데 웃긴다. 이변이 일어났다. 아이러니컬하게도 IT교수가 인문사회학을 강조하고 디지털시대의 명암을 논하니 오히려 학부생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고객의 개인정보나 시스템 보안을 소홀히 취급하는 기업은 정보화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말에 대학원생들이 진심으로 환호해 주었다.
마치 얼굴 없던 가수가 ‘나는 가수다’로 인해 새삼스레 인기를 누리는 것처럼 나는 무명교수생활 25년 만에야 ‘나는 교수다’에 출현해 비로소 박수갈채를 받은 느낌이었다. IT학도들조차 사실은 겉만 현란하게 진보하는 기술 문명에 지쳐있었던 까닭일까.
학기말엔 새로운 시도도 있었다. 다름 아니라, 인생 프로세스의 혁신방안을 제시하라고 한 것이다. BPR란 기업의 핵심 업무 프로세스에 파격적인 변화를 가해 고객의 관점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올리자는 IT 기반 경영혁신 사상 아니던가. 그러나 기업 아닌 개인의 남은 인생을 행복추구 관점에서 재설계해보라니, 아마도 다들 어안이 벙벙했으리라.
그러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학업·사랑·효도·취미·건강·직장생활·대인관계 등의 프로세스 현황(As-is)을 타진하고 바람직한 미래상(To-be)을 찾느라 심사숙고했을 법한 결과물이 많았다. 또한 보람 있었다는 소감은 물론, 의미심장한 과제였다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감동이 있던 학기가 끝났기에 허전한 것일까. 아무튼 난 앞으로도 IT가 과연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기술’인지를 학생들과 계속 토론할 계획이다. 반값등록금 이슈로 부끄러운 마당에 ‘나는 교수다’에서 탈락을 면할 좋은 비결인 듯 싶어서이다.
이주헌 객원논설위원·한국외국어대 글로벌경영대학 교수 jhl10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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