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CDMA 1단계 공동개발이 시작됐다.
1991년 8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있는 퀄컴 회의실에서 이원웅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무선통신개발단장(인천대학교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역임)과 어윈 제이콥스 퀄컴 사장은 제1단계 CDMA방식 공동개발 계약서에 서명한 뒤 악수를 하며 상호협력을 다짐했다. 한국 측에서는 이혁재 부장(현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과 김광호 사업개발실장(현 ETRI 책임연구원) 등이 참석했다.
체신부가 8월 23일 CDMA방식 기술도입을 승인하자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곧장 퀄컴과 1단계 공동개발 계약을 했다. 이날 체결한 공동기술계약 내용은 그해 5월 6일 맺은 기술협약서와 큰 틀에서 다를 게 없었다.
1단계 기술개발 내용은 5개월간 CDMA시스템 기술사항과 시스템 정의, 구조 설계 등을 공동으로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1단계 기술료로 190만달러를 퀄컴에 보냈다.
그해 9월 24일 CDMA기술을 배우기 위해 임명섭 박사(현 전북대학교 전자정보공학부 교수)를 팀장으로 5명의 연구원을 미국 퀄컴에 파견했다.
임 박사의 회고.
“무선통신시스템 분야 4명, 교환기 분야 1명 등 5명이 퀄컴으로 갔습니다. 퀄컴 인근에 아파트를 얻어 그곳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당시 함께 파견된 연구원은 권동승(현 ETRI 무선시스템연구부장), 정종태(현 이노와이어리스 회장), 이상철(현 미국거주), 이남준씨 등이었다. 이들은 사무실을 배정받아 퀄컴 측과 공동개발 및 시험평가 업무에 참여하면서 CDMA시스템 기술사항과 시스템 정의 등에 관한 기술을 배웠다. 이들은 샌디에이고 해변과 골짜기 등을 돌며 시험에도 참여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그해 10월 1일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원웅 단장이 맡고 있던 무선통신개발단을 정보통신연구단으로 개편했다. 기존 디지털이동통신 시스템과 위성통신기술 개발업무 외에 정보통신표준센터 업무가 추가된 데 따른 조치였다. 이에 따라 개발단 소속이던 이동통신분야를 연구개발본부로 확대해 연구소장 직속부서로 만들었다. 본부장에는 TDX-10개발업무를 6년간 담당했던 이영규 부장(TTA 전문위원 역임)을 임명했다. 그는 TDX-10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시스템 상용 부장을 역임했다.
이 본부장의 말.
“개발본부는 소장의 지시를 받는 직속부서였습니다. 비록 퀄컴과 1단계 공동개발을 체결했지만 여전히 CDMA방식의 개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조직을 정비하고 구체적인 상황파악에 나섰습니다.”
체신부와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CDMA방식의 기술개발에 나서자 국회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1991년 10월 18일.
이날 오후 2시 국회에서 열린 국회교통체신위원회에서 퀄컴과 CDMA방식의 1단계 공동 기술개발 계약이 논란이 됐다.
이교성 민주당 의원(고양자치연구소 대표 역임)은 “체신부가 1996년까지 441억원을 들여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을 개발하겠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이유로 정책을 변경했는가. 미 퀄컴의 CDMA방식을 123억원이나 주고 도입하기로 한 것이 특정업체를 선정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냐”며 체신부를 몰아세웠다.
조찬형 민주당 의원(현 변호사)도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경이 내정됐다는데 사실이냐”고 따져 물었다.
한국전파산업진흥협회(회장 정몽헌)는 그해 11월 13일부터 15일까지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현안인 ‘디지털 셀룰러 기술개발 세미나’를 열고 이동통신기술도입 방식에 관해 집중 논의했다. 사업자와 연구소, 학계 등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세미나는 성황이었다.
이 자리에서 15일 박성득 국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은 ‘새로운 이동통신 발전방향’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CDMA방식의 공동 연구참여는 CDMA기술이 앞선 기술이라는 점은 인정한 결과”라며 “현재 퀄컴에 우리 연구진 5명을 파견했으며 정부는 조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해 11월 23일 체신부는 전기통신을 총괄하는 1급 실장인 통신정책실을 신설하고 박성득 전파관리국장을 승진 발령했다. 박 실장은 중앙전파감시소장과 통신정책국장, 전파관리국장 등을 두루 거쳤다. 후임 전파관리국장에는 이인학 통신정책국장(정통부 우정국장, 데이콤 감사 역임)이 전보됐다. 이정행 기술과장(중앙전파관리소장 역임)은 변동이 없었다.
하루 뒤인 11월 24일. 이영규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본부장은 이헌 부장(현 텔에이스 사장)과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이 본부장은 12월 4일부터 5일까지 위싱턴에서 열리는 ‘차세대 이동통신기술 발표회’에 참석하기에 앞서 퀄컴을 방문했다. 퀄컴은 CDMA방식의 이동통신기술 현장 시험을 하고 있었다.
이 본부장의 기억.
“퀄컴은 그달 18일부터 시험을 했는데 계속 오류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무렵, 오류가 해결돼 정상 작동이 됐다는 겁니다. 샴페인을 터뜨리며 무척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이 본부장 일행은 25일부터 4일간 퀄컴의 시험차량에 CDMA통신시스템을 싣고 시내를 돌며 시험통화를 했다. 건물이 밀집된 번화가와 지하도 등을 돌아다녔다. 무선전화기처럼 생긴 휴대폰으로 대전으로 전화를 걸어 경상현 소장과 직접 통화했다. 이동 중에 전화가 끊기지 않는지 5분여에 걸쳐 시험통화를 했다. 성능이나 통화음질이 우수했다.
이 본부장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준비한 캠코더로 퀄컴의 연구실과 시설 상황 등을 모두 촬영했다.
이 본부장의 기억.
“공항에 와서 보니 테이프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추측하건대 퀄컴 쪽에서 그 테이프를 빼낸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증거가 없으니 항의도 못하고 그냥 왔습니다.”
이 본부장은 12월 4일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국 이동통신산업협회(CTIA) 주최로 열린 ‘차세대 이동통신기술 발표회’에 참석했다. 이틀간 진행된 발표회는 TDMA와 CDMA를 비롯해 새로운 방식의 이동통신 기술이 총출동해 경쟁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이원웅 단장과 국내 산학계 인사 등 10여명도 참석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TDMA가 대세를 이뤘고 CDMA는 주목받지 못하는 기술이었다. 첫날까지 그런 분위기였다. 둘째날인 25일 어윈 제이콥스 퀄컴 사장이 직접 나서 ‘왜 CDMA인가’라는 주제로 그간의 시험결과를 발표하면서 분위기는 일시에 확 바뀌었다. 제이콥스 사장은 샌디에이고에서 시험한 비디오를 보여주며 기술적 우수성을 소개했다.
이 단장의 회고.
“모든 참석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분위기가 확 바뀌었어요.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CDMA방식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출장에서 돌아온 이 본부장은 미국에서 본 사실을 소상하게 보고서로 작성해 경 소장에게 제출했다.
이 본부장의 말.
“퀄컴은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그게 약점이죠. 그에 비해 우리는 이미 TDX-10을 자체 개발했습니다. 퀄컴의 RF원천기술만 들여오면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CDMA기술은 퀄컴의 RF가 30%고 우리 TDX-10이 70%입니다.”
그는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이인학 체신부 국장에게도 전달했다.
체신부는 그해 12월 17일부터 27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산업계와 학계, 연구계 연석회의를 열어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 개발을 검토했다. 회의에서는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 개발동향과 접속방식, 주파수, 공급시기, 산업체 참여방안, 신규사업자의 공급통신방식 등을 검토했다. 이어 검토내용에 대한 각계 의견을 수렴해 최종 정책을 결정했다.
12월 18일 회의에는 이영규 본부장이 발표자로 나섰다. 체신부는 이 자리에 미국 발표회에 다녀온 국내 관계자를 모두 참석시켰다. 이 본부장은 CDMA와 TDMA, NAMPS 방식의 시험결과를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마지막 6차 회의는 12월 27일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산학연 합동으로 열렸다. 총정리하는 최종 회의였다.
이인학 국장을 비롯해 이정행 기술과장, 김영재 한국통신 실장, 성태경 한국이동통신 상무, 조성용 데이콤 상무, 박한규 연세대 교수, 김정기 중앙대 교수, 진용옥 경희대 교수, 차균현 고려대 교수, 김영철 현대전자 이사, 이원태 금성정보 상무, 천경준 삼성전자 실장, 이영규 본부장 등 18명이 참석했다.
이정행 과장이 20분에 결쳐 항목별 주제를 발표했다. 이날 회의 사회는 박한규 교수가 맡았다. 논의 과정에서 TDMA 찬성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론은 CDMA방식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 28일 토요일 오전 10시.
체신부는 윤동윤 차관(체신부 장관 역임, 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 주재로 전파산업육성협의회를 열어 디지털시스템개발에 따른 산정방식과 신규사업자 공급 방식 등을 확정했다. CDMA 첫 상용화로 가는 길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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