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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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성 국무총리(오른쪽)가 1996년 4월 1일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열린 CDMA방식 디지털 이동전화 개통식에서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CDMA 도전<1>

 

 가지 않으면 길은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한국이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CDMA 방식 이동통신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간 ‘도전의 선물’이었다. 미지의 기술에 과감히 도전하고, 그 길을 고집스럽게 달렸기에 그 분야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CDMA 첫 상용화 과정은 처절한 형극의 길이었다. 하지만 ‘그랜드 디자인’을 향한 정책적 신념은 성벽처럼 견고했다. 정부와 장관이 바뀌어도 정책은 불변이었다. 연구진과 기업의 상용화 열정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CDMA 첫 상용화는 정부와 연구소 기업의 삼합(三合)이 이룩한 ‘대하 드라마’였다.

 목련이 꽃망울을 맺기 시작한 1996년 4월 1일.

 충남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는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오전 9시 반경 검은 승용차들이 연이어 전자통신연구소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이수성 국무총리(새마을중앙회장 역임, 현 통일을 위한 복지기금재단 이사장)를 비롯해 이석채 정통부 장관(현 KT 회장), 정근모 과학기술처 장관(현 한국원자력대학원대학교 설립추진위원장) 등과 이준 한국통신 사장(국방부 장관 역임),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과기부 장관, 초당대 총장, 전자무역추진위원장 역임, 현 명지대 석좌교수), 정태기 신세기이동통신 사장(한겨레신문 사장 역임, 현 대산농촌문화재단 이사장) 등 정보통신업체 대표들이 양승택 소장(정통부 장관, 동명대 총장 역임, 현 KAIST 초빙석좌교수)의 영접을 받으며 속속 도착했다.

 이날 오전 10시.

 한국이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CDMA 방식 디지털이동전화 및 대덕 정보화시범지역 멀티미디어서비스 개통식이 열렸다. 정부는 이날부터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데 성공한 CDMA 이동전화시스템과 대덕 정보화시범지역 서비스를 시작했다.

 정보화시범지역 멀티미디어서비스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의 하나로 대덕연구단지 내 400가입자를 대상으로 주문형비디오, 전자도서관, 전자신문 등 각종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총리는 기념식에서 CDMA 이동통신시스템 개발과 정보화시범지역 사업추진에 공로가 많은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이혁재 전자통신연구소 책임연구원(현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에게 동탑산업훈장, 한기철 전자통신연구소 책임연구원에게 철탑산업훈장을 주었다. 또 김용준 전자통신연구소 책임연구원에게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 및 기술개발에 기여한 공적으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이 밖에 이정율 LG정보통신 연구위원 등 3명과 박학송 한국통신 강원본부장이 산업포장을 수상했으며 강계환 한국이동통신 부장 등 11명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 총리는 기념행사 후 이동전화기로 서울 혜화초등학교 홍종준 교장과 직접 통화를 한데 이어 전시관에서 열린 초고속정보통신서비스 시연회에 참석했다.

 이 총리는 시연회에서 정보화시범지역 내 한울아파트에 사는 주부 정경원씨와 영상대화 서비스를 통해 이용 소감을 묻고 가족사진을 즉시 전송받는 등 초고속서비스를 직접 시험했다.

 CDMA 상용화는 새 이동통신시대를 여는 ‘미래의 창’이었다.

 6년여의 긴 여정에 기술자립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려는 장애물과 이해집단 간의 갈등이 많았지만 기술자립의 열정과 의지는 막을 수 없었다.

 CDMA 첫 상용화라는 ‘대하 드라마’에는 등장 인물들이 많다. 그들 중 조연(助演)은 없다. 그 역할이 크건 작건 모두 CDMA 상용화를 위한 기술도입과 개발, 정책 등에 서 모두 주연(主演)이었다.

 1989년 1월 26일.

 최영철 체신부 장관(통일부총리 역임, 현 서경대학교 총장)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새해업무보고를 통해 통신기술고도화와 대북방송통신교류 등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개발 중인 TDX-10의 실용시험을 연내에 마무리하고 1993년까지 대량 공급하겠다고 보고했다.

 체신부는 이에 따라 낙후된 이동통신기술을 끌어올리기 위해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 개발을 국책과제로 선정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1988년부터 디지털 무선통신시스템 개발과제를 추진하고 있었다. 체신부는 날로 폭증하는 국내 이동전화 수요를 최대한 충족시키고 이동통신기술을 하루 빨리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연구소가 추진 중인 과제를 확대 개편한 것이었다. 개발과제가 확대 개편됨에 따라 연구개발 목표도 기지국과 단말기 개발에서 이동통신교환기까지 포함하는 전체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이를 주관한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의 표준규격을 제정하기 위해 각국의 방식을 연구했다. 당시에는 TDMA 방식을 근간으로 외국 업체와 공동개발을 추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이 방식을 채택할 경우 기술이전과 핵심기술 확보가 어려워 기술종속의 우려기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런 와중에 당시로선 생소한 CDMA 이동통신기술이 등장한 것이다. CDMA 도입의 물꼬를 튼 사람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이원웅 무선통신개발단장(인천대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역임)이었다.

 1990년 11월 초.

 미국 모토로라에 TDMA 방식에 관해 기술협의차 출장갔던 이원웅 단장은 귀국길에 뉴욕에서 나이넥스에 근무하던 오태원 박사(현 고려대 컴퓨터통신공학부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박사 잘 지내요.”

 “이 단장님 웬일이세요. 뵙고 싶은데 시간을 내 주세요.”

 오 박사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이 단장 아래서 근무하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오 박사는 당시 퀄컴의 이동통신 분야 기술시험을 주관했다고 한다.

 나이넥스를 찾은 이 단장에게 오 박사는 연구소를 소개하고 이어 신기술 몇 가지를 소개했다. 그 중 하나가 퀄컴이 필드테스트에 성공했다는 CDMA 방식의 이동통신기술이었다.

 비디오를 통해 그 기술을 본 이 단장이 물었다.

 “퀄컴이란 회사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누가 사장이오?”

 “어윈 제이콥스와 앤드루 비터비가 세운 벤처회사가 바로 퀄컴입니다. 그들이 개발한 기술입니다.”

 이 단장은 순간 ‘이 정도라면 70점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퀄컴 경영진인 두 사람은 통신공학의 대가로 세계적인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아폴로프로젝트를 위해 링커비트라는 벤처회사를 설립해 통신장비를 공급했고 이어 퀄컴을 만들어 CDMA를 이동통신에 적용하는 기술방식을 연구한 것이었다. 특히 비터비는 이 분야 노벨상이 있다면 수상자감이었다.

 이 단장의 말.

 “세계적인 통신권위자들이 개발한 기술이어서 처음인데도 순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사용이어서 그 기술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고 자료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전망은 밝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국에 돌아 온 그는 CDMA 방식 이동통신기술에 관해 경상현 소장(한국전산원장, 체신부 차관, 정통부 장관 역임, 현 KAIST 겸직교수)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경 소장은 이 단장이 미국출장 무렵, 미 팩텔의 한국지사장인 박헌서 박사(현 한국정보통신 회장)에게 CDMA 방식에 관해 이미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박 사장은 코넬대 정보통신공학 박사로 경 소장이 1976년 말 전자교환기 도입기종의 총괄책임을 맡았을 때 생산반 책임자로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그가 대전으로 내려와 CDMA 기술을 소개한 것이었다. 당시 미 팩텔은 퀄컴에 투자를 했던 것이다.

 경 전 장관의 회고.

 “당시로선 생소한 기술이었습니다. 박 사장은 CDMA 방식이 장래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차에 이 단장이 귀국해 CDMA 방식의 기술을 보고했습니다. 그렇다면 퀄컴을 직접 방문해 실태를 파악해 보자고 해서 다시 출장을 보냈지요.”

 이혁재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부장 등 연구원들도 이 무렵, 팩텔의 월리엄 리 기술부사장을 초정해 TDMA 기술 강연을 들었다. 박 사장이 교량역할을 했다. 그 자리에 앨런 살머시 퀄컴 부사장이 함께 나타났다.

 이혁재 부장의 설명.

 “당시 외국의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을 자주 들었어요. 그런데 월리엄 리가 TDMA를 제쳐놓고 CDMA 방식의 우수성을 강조했어요. 그는 통신 분야의 대가였습니다. 그때 퀄컴의 경영진이 세계 통신공학계의 태두인 어윈 제이콥스와 앤드루 비터비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 단장은 1991년 1월 22일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그 과정에 박 사장이 퀄컴 측과 일정 조정 등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 무렵, 걸프전이 치열했다. 1월 16일 발발한 걸프전은 미국을 주축으로 다국적군이 이라크와 쿠웨이트 내 목표물에 대한 공중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단장의 말.

 “그날 오후 미국으로 가려고 하니까 주위에서 전쟁이 한창인데 그곳으로 왜 가느냐고 말렸어요. 당시 미 해군본부가 퀄컴이 있는 샌디에이고에 있었거든요.”

 이 단장은 출장길에 김광호 연구소 사업개발실장과 동행했다. 이 단장은 퀄컴에 도착한 다음날인 1월 23일 퀄컴과 양해각서(MOU)를 교환했다. 퀄컴에서는 어윈 제이콥스 회장이, 그리고 한국 측을 대표해 이 단장이 각각 서명했다.

 “양해각서는 서로 손잡고 잘해보자며 맺는 것이어서 부담은 크지 않았습니다.”

 당시 CDMA 방식의 처지는 처량했다. 나름대로 최신 기술이라고 개발은 해 놨지만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도 TDMA가 표준이어서 CDMA 방식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CDMA 방식에 한국이 다가가 공동개발의 손을 내민 것이다. 기적의 ‘대하 드라마’는 이렇게 시작됐다.

 IT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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