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것도 없고 하라는 것도 없다. 하고 싶은 것만 있을 뿐이다.” 2011년 은행IT 전망을 묻는 질문에 한 은행 관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해야 할 것’은 자본시장이나 국제회계기준(IFRS) 등 규제에 대응할 수 있는 IT 프로젝트를 일컫는다. 올해를 기점으로 은행권에서 법 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대형 IT프로젝트는 사실상 끝났기 때문이다. 바젤3는 아직 은행IT에 미칠 영향이 구체화되지 않았으며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에 따른 퇴직연금시스템도 이미 대부분의 은행이 재구축을 완료했다.
‘하라는 것’은 차세대나 정보계시스템 구축 등 금융환경 변화에 따른 전사적인 대응을 뜻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은행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후화된 IT시스템의 전면 재구축을 요구했다. 하지만 올해 초 국민은행을 마지막으로 대형 은행들의 차세대 프로젝트도 모두 마무리됐다.
그렇다면 이제 ‘하고 싶은 것’만 남은 셈이다. 획일적으로 진행돼 온 그동안의 프로젝트와 달리 새해에는 은행마다 스스로 환경에 맞게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정보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은행별로 구체적 계획의 차이는 있겠지만 새해 IT프로젝트는 주로 상품, 채널, 고객 등 세 영역에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공통된 핵심 고민이 될 전망이다.
◇시장 구도 재편된다=2011년 은행IT를 전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시장구도 재편이다. 하나은행의 외환은행 인수에 이어 내년엔 우리은행과 산업은행의 민영화가 본격 추진될 전망이다. 이 은행들의 합병과 민영화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따라 은행권 경쟁구도는 크게 변화할 가능성도 있다.
외환은행을 인수한 하나은행은 당분간 ‘투 뱅크’ 체제를 유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상품 교차판매 등 상품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IT부문을 먼저 통합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조흥은행을 합병한 신한은행은 2년 정도의 준비과정을 거쳐 IT통합에 착수했다. 이 사례에 비춰볼 때 하나은행도 내년 IT부문 통합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시작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외환은행 IT인력들의 하나INS로의 흡수 여부도 관전포인트 중 하나다.
우리은행 민영화는 내년 상반기 은행권에서 제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독자 민영화는 물건너갔지만 다시 민영화가 추진되면 광주은행과 경남은행의 분리매각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인수를 통한 지방은행들의 몸집 불리기와 인수 후 통합 과정에서 IT조직과 전략 개편은 눈여겨볼 대목 중 하나다.
현재 차세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부산은행과 대구은행은 IT통합의 이슈를 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은행의 민영화 이후엔 산업은행의 민영화가 연이어 추진된다. 산업은행은 올해 초 진행했던 2기 차세대에 대한 검토 작업을 민영화 이후로 미뤄둔 상태다. 따라서 매각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차세대 사업에 착수하게 된다.
산업은행 최고정보책임자(CIO)인 정순정 IT센터장은 “차세대 사업은 보류된 상태지만 지주회사 체제에 부응하고 시너지를 창출하기 위한 통합 IT전략은 꾸준히 시행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장구도 재편과 함께 은행 IT조직의 변화도 예상되는 이슈 중 하나다. 최근 KB금융지주가 셰어드서비스센터(SSC)를 핵심으로 하는 지주사 IT조직 통합을 전면 백지화함으로써 SSC의 효율성에 대한 논쟁이 한층 가열될 전망이다.
이번 사례는 하나은행과 신한은행처럼 아직 은행 IT조직이 건재한 곳과 향후 지주사 설립을 계획 중인 기업은행, 농협의 IT 통합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KB금융지주가 계열사별 IT조직 효율화로 방향을 바꿈으로써 향후 국민은행 IT조직의 행보에 타 은행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모바일’ 열풍 계속=올해 은행IT의 화두는 법 규제 대응과 모바일 인프라 확보, 차세대 이후 시스템 고도화 등이었다. 대다수 은행이 자본시장법과 IFRS 대응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분주했으며 스마트폰 뱅킹 서비스를 위한 애플리케이션을 앞다퉈 내놓았다. 2000년대 초·중반 차세대시스템 구축을 마무리한 은행들은 2기 차세대로 눈을 돌리고 있으며 다른 후발 은행들은 차세대 때 구현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완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내년에도 이런 연장선에서 각종 IT프로젝트가 계속될 전망이다. 대규모 프로젝트는 없지만 IFRS는 내년에도 은행IT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제도 시행 첫해에 맞춰 급하게 계정계 부분의 기본적인 결산시스템만을 갖춰놨기 때문에 그 후속 작업으로 리스크 관리를 비롯한 기능 고도화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2010년 초부터 불어닥친 스마트폰 열풍에 맞춰 은행들도 스마트폰 뱅킹 서비스를 위해 각 운용체계(OS)에 맞는 애플리케이션을 출시하는 데 집중했다. 스마트폰 뱅킹 서비스는 단순히 뱅킹 부문의 매출 증대뿐만 아니라 고객들을 은행의 다양한 상품으로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됐다.
내년엔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스마트패드(태블릿PC)를 위한 애플리케이션 개발 등 모바일 금융서비스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곳은 농협이다. 농협은 지난 9월 시작된 ‘스마트NH’ 프로젝트를 통해 하나의 애플리케이션으로 PC, 스마트폰, 스마트패드와 같은 다양한 장비에 접속해 뱅킹과 상품구매 등 농협 전 계열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농협은 2012년까지 관련 인프라를 구축하고 서비스를 내놓을 방침이다.
올해 초 국민은행이 차세대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음으로써 수천억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한국씨티은행이 내년에 차세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지만 100억원 규모에 그칠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차세대 이후, 즉 포스트 차세대를 심도 있게 고민하고 있다. 시스템의 전면 재구축부터 고도화 등이 모두 포스트 차세대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은 기업은행이다. 기업은행은 2004년 구축된 현행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2기 차세대를 준비 중이다. 내년 하반기에 본격적인 착수가 예상되며 빅뱅과 단계별의 프로젝트 방식에 대한 결정이 남은 상태다.
◇2011년 은행IT는 10인 10색=올해 3000억원을 웃돌던 주요 은행들의 평균 IT예산은 내년에 약 2600억원 규모로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의 경우 올해에 비해 많게는 20% 이상 예산이 줄어들 전망이다. 우리은행은 올해와 비슷한 수준에서 예산이 책정될 것으로 보이며 신한은행, 농협, 기업은행 등은 소폭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은행 CIO인 조봉한 부행장은 “올해와 비교해 내년엔 비교적 큰폭으로 IT예산이 줄어들 전망”이라며 “퇴직연금과 IFRS, 증권수탁시스템 등 대규모 IT사업이 모두 마무리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산이 증가한 곳도 시스템 증설과 임금 인상 등 자연 증액이 증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11년 은행 IT는 대규모 투자가 사라진 가운데 은행별 고민과 전략이 반영된 ‘10인 10색’ 형태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홍현풍 우리은행 IT지원부장은 “차세대를 비롯해 굵직굵직한 프로젝트가 마무리됐기 때문에 은행 전체적으로 공통적인 이슈는 없을 것”이라며 “은행별로 기존 시스템의 고도화나 스마트폰 서비스의 보안 강화 등이 주요 정보화 사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몇몇 은행들은 다양한 기관의 수탁업무를 수행하는 증권수탁시스템, 자본시장시스템, 퇴직연금시스템 등 아직 구축하지 못한 시스템 구축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일부 은행 사이에선 그린IT 구현을 위한 활동도 더욱 본격화될 전망이다. 하나은행이 IT부문에 우선 적용해 진행 중인 그린IDC 사업, 기업은행의 서버 가상화 프로젝트, 신한은행과 농협, 기업은행이 추진 중인 데스크톱 가상화 등이 모두 그린IT 사업에 해당한다.
지난 9월 그린IDC를 선보인 하나은행은 내년엔 IT부문뿐만 아니라 은행 전 부문에도 탄소배출량관리시스템을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또한 기업은행은 2013년까지 예정돼 있던 서버통합 프로젝트 5개년 계획을 1년 앞당겨 내후년 마무리지을 예정이다.
한편 우리은행과 하나은행 등에서 추진 중인 모바일 오피스, 새주소 체계 도입에 따른 기존 주소 데이터 이전과 새주소 관리체계 도입 등도 내년 은행의 주요 IT 사업 중 하나다.
IT업계의 최대 관심사인 클라우드 컴퓨팅은 우리금융그룹이 지주사 차원에서 준비 중이지만 대부분의 은행들이 신클라이언트 혹은 제로클라이언트를 기반으로 한 데스크톱 가상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거나 도입하고 있다. 보안과 안정성 이슈 때문이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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