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우주 빅뱅의 시작인 100만분의 1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빅뱅 직후의 고온·고밀도 상태에서 어떤 형태로 안정된 입자가 만들어졌고 성질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현재 물질의 핵을 형성하는 강력한 힘과 기초적인 입자가 어떻게 서로 뭉치게 됐는지 등을 알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달 초 우리나라를 방문한 롤프디터 호이어 CERN(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 사무총장의 얘기다.
만물의 시초, 우주 탄생의 거대한 비밀이 지구 한 편에서 과학실험으로 서서히 벗겨지고 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철학이나 종교학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태초 우주만물의 근원을 탐구하는 일은 이제 인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과학실험으로 가능해졌다.
신의 영역으로 불리는 이러한 우주 생성의 비밀에 피조물인 인간이 직접 실험을 통해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은 현대 과학기술의 총아로 불리는 ‘입자가속기’ 덕분이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거시세계를 다루던 공·과학 분야는 21세기 들어 나노테크놀로지(NT)처럼 분자 및 원자 차원의 미시세계를 집중 탐구하고 있다. 1930년대 유럽에서 시작된 입자가속기 개발은 바로 이러한 연구를 목적으로 양성자·전자·이온 등 전기를 띤 입자를 전기장을 이용해 빛의 속도(초속 30만㎞)로 가속하는 장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현재 중이온가속기, 양성자가속기 등 가속 입자에 따른 여러 종류의 가속장치가 유럽과 일본 등에서 속속 개발되고 있다. 가속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입자 가속 능력 또한 계속 높아져 1950년대 1기가전자볼트(GeV) 수준에서 1970∼1980년대에는 50GeV 이상으로, 현재에는 테라전자볼트(TeV) 수준까지 와 있다.
◇태초의 비밀을 겨누다=주목할 점은 입자가속기의 활용이다.
대표적으로 무려 29억달러를 투입해 2008년 완성한 길이 27㎞의 거대 강입자충돌가속기(LHC:The Large Hadron Collider)는 우주의 신비를 풀어줄 CERN의 핵심 연구장비다.
가속기로 가속한 입자를 인위적으로 진공관 속에서 충돌시키면 거대한 폭발과 함께 순간적으로 수많은 현상(반응)과 새로운 입자가 만들어진다.
빅뱅과 같은 우주의 시초를 밝히는 사상 초유의 실험은 양성자와 원자핵 같은 강입자를 7TeV의 에너지로 가속해 입자를 충돌(14Tev)시킬 수 있는 LHC가 있기에 가능했다.
CERN은 LHC 건설 당시 LHC 실험 목적을 ‘힉스 입자’ 발견을 통한 현대 물리학계의 ‘표준모델’ 입증, 빅뱅(Big Bang)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현대 물리이론 검증,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의 실체 등을 규명하는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첨단 입자가속기는 우주 연구와 함께 ‘소우주’로 불리는 인간 신체 탐구에서도 획기적인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바로 암 치료다.
의료용 가속기 개발과 암 치료 기술에서 세계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독일에서는 가속기를 이용해 3차원으로 암 덩어리를 스캔해 치료하고, 암세포의 움직임까지 따라가 정확히 잡아내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일직선의 빔을 쏴 암을 치료하던 방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3차원으로 암 덩어리 전체를 스캔해 맞춤 형태로 암세포를 제거하는 ‘3차원 빔 트래킹 시스템’과 심장·간 등 움직이는 장기 부위의 암세포에 맞춰 빔을 미세 이동시켜가며 치료하는 ‘빔 이동 암세포 제거’가 그것이다.
또 암 진단과 암 치료로 이원화됐던 기술은 새로운 가속기 개발 및 이를 활용한 응용기술의 발달로 진단과 치료를 동시에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임신한 여성의 암 치료에서 태아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종양을 제거하는 치료 기술도 상용화한 상태다.
◇암치료와 IT 네트워크의 미래=첨단 입자가속기는 핵입자물리학이라는 기초과학을 토대로 IT와 기계·소재 등 여러 분야가 결합된 융합 장비라는 점에서 타 학문과 산업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월드와이드웹(WWW)은 CERN의 연구 과정 속에서 처음 등장했고, 다량의 정보를 어떻게 한곳에 모아 보다 편리하게 공유·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클라우드 컴퓨팅을 낳게 했다.
LHC와 함께 CERN이 구축한 LCG(LHC Computing Grid)는 LHC 실험 가동에서 나오는 막대한 규모의 실험 데이터의 저장·처리·분석을 위해 전 세계의 컴퓨팅 자원을 그리드 기술을 이용해 연결한 네트워크다.
LHC에서 양성자 빔이 발사되는 순간부터 생성되는 정보의 양은 1초당 300MB에 이르며, 실험이 시작 된 후 1년 동안 수집되는 정보량은 CD에 담으면 지상에서 600㎞ 이상 CD(2000만장)를 쌓아야 할 분량이다.
또 CERN은 그리드 컴퓨팅에 이어 최근 고속의 저장압축 프로그램과 정보관리시스템까지 직접 개발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관련 보안기술 연구와 비즈니스 적용 방안도 별도의 프로젝트로 추진하고 있다.
CERN의 연구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유인권 부산대 교수(물리학과)는 “첨단 가속기의 활용은 우주 연구부터 암 치료 등 의료·물질의 구조분석, 희귀원소 생성 등 다양할 뿐만 아니라 해당 사회와 국가의 기초과학 진흥을 이끌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자 장비”라고 말했다.
부산=임동식기자 dsl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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