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9>

제목/난산 속에 마련한 정보화촉진법기본법안 정부조직개편으로 다시 보류



사진-1.윤동윤 장관이 1994년 1월 13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새해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2.김영삼 대통령이 1994년 7월 2일 신경제5개년계획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정보화촉진기본법 줄다리기



1992년 12월 18일 실시한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유효투표 42%를 얻어 당선됐다. 문민정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온다던 새벽이 선거를 통해 찾아온 것이다.

그해 12월 말. 김 당선자는 경남 마산에 사는 부친(김홍조) 자택을 방문했다.

“어버지 이것 한 장 얻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래 욕봤데이….”

당선통지서를 앞에 놓고 부자간에 나눈 이 대화는 한동안 인구에 널리 회자됐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을 한 달 여 앞둔 1993년 1월 28일.

최각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지난해 12월 수립한 정보산업에 대한 획기적 지원을 위한 법적근거를 마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경제기획원은 이미 작성된 정보산업 발전전략계획을 토대로 체신 · 상공 · 교육 · 과기처 등 관계부처와 합동으로 업계, 학계 등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과제별로 구체적 시행계획을 상반기 중에 확정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예산이 필요한 사업은 내년도 예산에 이를 반영할 수 있도록 하고 제도개선이나 법령 개정 등은 임시국회 등에서 처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컴퓨터와 주변기기, 정보망 등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해 제조업 수준의 각종 금융, 세제혜택을 주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정보화촉진기본법`도 4월말까지 시안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경제기획원의 이런 발표는 다소 의외였다. 국가경제를 총괄하는 경제기획원이 정보산업에 이처럼 관심을 보인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는 다분히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되는 체신부를 의식한 것이었다.

1993년 2월 25일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첫 조각에서 체신부 장관에 정통 체신관료 출신인 윤동윤 차관을 임명했다. 첫 체신부 관료 출신 장관이었다.

윤 장관은 3월 31일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에게 한 첫 업무보고를 통해 “제2이동통신사업자를 조기에 선정하고 정보화촉진과 정보통신산업육성에도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체신부는 대통령의 대선 공약사항과 개혁의지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보화촉진 및 정보통신산업 발전특별법(시안)의 입법을 추진키로 했다. 체신부는 4월 22일 황길수 법제처장(현 변호사) 주재로 열린 각 부처 법무담당관 회의에서도 우선적으로 제정할 법안으로 정보산업 발전특별법안을 제출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이규태 법무담당관(서울체신청장 역임, 현 한국IT비즈니스진흥협회 부회장)의 말.

“그날 회의는 경제 활성화 및 개혁정책을 위해 부처별로 우선 정비할 법제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체신부는 그해 제정하거나 개정할 법제 계획으로 정보산업육성 특별법 제정안을 냈습니다.”

이 법안의 업무라인은 박성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협회장)과 이인표 통신정책국장(SKT 감사 역임), 류필계 정보정책과장(정통부 정책홍보관리본부장 역임, 현 LG유플러스 부사장), 강성주 사무관(현 행안부 정보기반정책관) 등이었다.

법 초안을 만들었던 강 사무관의 증언.

“당시 정보산업 정책을 놓고 체신부와 상공부, 과기처 등 3개 부처가 경쟁적으로 관련 법령을 만들었습니다. 체신부는 정보화촉진 및 정보통신산업발전특별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법안은 정보통신산업 육성을 위해 국가가 매년 정보화촉진사업에 일정액을 투자하며 정보화촉진을 위해 지출한 일정액에 대한 소득세 또는 법인세 감면혜택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체신부는 7월 30일 오전 국회에서 당정회의를 갖고 이 법안에 대한 심의까지 끝냈다.

그러나 이 법안은 곧 난관에 봉착했다. 상공부와 과학기술처 등 관계부처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들 부처와 협의가 난항을 겪자 경제부처 간 정책조정 기능을 가진 기획원이 조정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경제기획원이 3개 부처의 법안을 취합해 정보화촉진기본법을 마련하기로 했다.

경제기획원은 8월 4일 기본법을 마련해 국무회의와 대통령 재가를 받아 9월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경제기획원이 초안을 내놓자 일이 더 꼬이기 시작했다. 부처 간 합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기획원이 일방적인 법안을 마련한 탓이다.

강 사무관의 기억.

“법안 내용이 허술한데다 기존 체신부가 하던 일들을 경제기획원이 행사하겠다는 의도였어요.”

특히 정보통신진흥기금의 운용주체와 관련해 체신부는 기획원 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획원은 기금운용과 관련해 복수안을 마련했다. 1안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위원장으로 경제기획원이 기금운용을 맡는다는 내용이다. 2안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고 체신부 장관이 간사를 맡는 안이었다. 1안에는 상공부가 찬성했다. 2안은 체신부가 지지했다. 이 안대로라면 전산망법과 정보통신연구개발법 등에 따라 정보통신진흥기금 등의 자금과 전산망조정위 등 그동안 해온 체신부의 기능을 경제기획원이 대부분 흡수하는 형태였다.

차관시절 어렵게 정보통신진흥기금을 조성한 윤동윤 체신부 장관의 회고.

“차관시절인 1991년에 정보통신연구개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정보통신진흥기금을 조성했습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당시 부처 협의를 거쳐 법안이 경제차관회의에 상정됐는데 재무부 이수휴 차관(보험감독원장 역임)이 기금 조성에 반대했다. 경제차관회의는 강현욱 경제기획원 차관(농림부 장관, 전북지사 역임, 현 조선대 이사장)이 주재했다. 그는 윤 차관과 행시동기로 처음 체신부로 발령받았다가 나중에 경제기획원으로 옮겨 승승장구했다. 강 차관이 윤 차관에게 “여기서 기금이 빠지면 안되지 않느냐.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윤 차관은 “보류하자”고 했다. 회의가 끝난 뒤 강 차관이 윤 차관에게 “이 차관을 한 번 만나라”고 했다. 그래서 재무부 차관실로 가서 이 차관에게 협조를 구해 기금을 조성한 것이었다. 체신부는 우체국에서 취급하는 체신금융과 관련해 재무부에 그만한 반대급부를 주었다.

경제기획원은 9월 27일 이 법안을 입법 예고했지만 논란은 오히려 증폭됐다.

부처 간 대립이 격화되자 이경식 부총리가 중재안을 냈다. 일단 이견이 있지만 법안을 국회에 내자는 것이었다. 윤 장관은 “그렇게는 절대 못한다”고 반대했다.

결국 경제기획원과 체신부, 과기처, 산자부 등 4개 부처 장관들은 별도로 9월 28일과 10월 9일 두 차례 회의를 열어 논의한 끝에 10월 13일 정보화촉진기본법의 내용을 대폭 손질하기로 합의했다. 합의 사항은 정보화촉진기금 조성부분은 기존 체신부의 정보통신진흥기금을 흡수하는 형태가 아닌 별도의 기금조성이나 정보예산집행 방식으로 변경하며 중복되는 업무에 관해서는 총괄조정회의를 만들어 이를 조정한다는 것이었다.

윤 장관의 회고.

“경제기획원이 마련한 법안은 크게 국가정보화촉진과 정보화촉진 기반조성 등 2개 부문으로 구분해 정부시책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내용 대부분이 기존 법률에 의해 체신부가 하고 있는 업무였습니다.”

체신부는 대안으로 정보산업촉진기본법안을 제시했다. 이 법안은 극한으로 치닫던 부처 간 법안 논쟁을 일단 타결국면으로 접에 들었다.

체신부 안은 정보화촉진 부분을 현행대로 각 부처에 맡기고 정보산업발전에 초점을 맞춰 경제기획원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정보산업발전정책심의회`를 설치해 정보산업발전기본계획심의 조정과 관계 부처 간 정책조정, 민간업계의 의견수렴 등의 기능을 맡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또 부처별로 무리 없이 추진되는 사업은 그대로 각 부처에 맡기고 중복된 기능이나 미흡한 부문은 조정하는 방향으로 법안을 수정키로 했다.

정부는 그해 12월 법안명칭을 정보산업기반조성에 관한 법률로 바꾸고 경제장관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12월 16일 우루과이라운드 쌀시장 개방의 책임을 황인성 국무총리와 이경식 경제부총리가 전격 경질되는 등 정치적인 격랑이 거세지자 이 법안 추진은 뒷전으로 밀렸다.

새해를 맞아 1994년 1월 13일 윤동윤 장관은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에게 한 신년 업무보고회에서 “통신사업구조 개편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며 정보통신진흥기금도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늘리겠다”고 보고했다. 윤 장관은 연말까지 9900여억원의 기금을 조성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법안은 4월 23일 이회창 총리가 전격 경질되면서 다시 뒤로 밀렸다.

지지부진하던 이 법안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아 · 태 순방 및 아태경제협력기구(APEC)정상회담 참석을 마치고 11월 19일 귀국하면서부터다. 김 대통령은 귀국 전 호주 시드니에서 국정목표를 세계화에 두겠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이 무렵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이 극비리에 정부조직개편안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박 실장은 정부조직개편에 소극적이던 김 대통령을 설득해 정부조직개편을 관철시켰다.

체신부는 세계화 구상 발표 후 경기도 용인의 한 콘도에서 체신부와 정보통신정책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등과 관련업계 인사 등 10여명으로 팀을 구성해 정보화촉진기본법안을 최종 손질했다.

법안은 1994년 11월 23일 경제차관회의와 25일 경제장관회의를 통과했다. 차관회의 때는 부처 간 이견을 조정하지 못해 표결에 부쳐야 했다. 11개 경제부처 차관 중에서 이 법안에 상공자원부와 농림수산부 등 2개 부처가 반대표를 던졌다. 나머지는 찬성이었다. 이렇게 해서 3년여에 걸쳐 법안 논쟁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난산 끝에 확정한 이 안은 또 멈춰서야 했다. 김 대통령이 12월 4일 사상 최대폭의 정부조직개편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조직개편에서 체신부는 정보통신부로 확대개편키로 했다.

정통부 산파역을 한 윤동윤 체신부 장관은 12월 6일 기자회견을 열어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확대개편됨에 따라 정보화촉진기본법의 입법 추진이 보류됐다”라고 밝혔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일은 예측불가의 연속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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