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 4일 정보화촉진기본법 제정.
이는 IT강국과 국가정보화의 지평을 연 이정표였다. 미래부서로 새롭게 출범한 정보통신부가 명실상부한 국가정보화선도부서로 위상을 정립하게 한 법이었다.
행정 부처가 파워를 가지려면 몇 가지 기본 전제가 필요하다. 첫 째는 사람, 즉 인재가 몰려야 한다. 둘 째는 예산이다. 국익을 위한 사업도 예산이 없으면 추진할 수 없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틀이 바로 법이다. 정부 조직의 업무범위와 역할은 법이 규정한다.
그런 점에서 정보화촉진기본법 제정의 의미는 크다. 그동안 각 부처로 흩어져 있던 정보화 및 정보산업관련 정책을 범정부 차원에서 정통부가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 법은 정보화촉진과 정보통신산업 진흥, 그리고 정보통신기반 고도화 등을 포괄했다. 이를 위해 정보화촉진기금을 설치, 운영키로 했다.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의 말.
“정보통신산업 진흥에 국한하지 않고 국가정보화라는 큰 틀의 종합적인 비전을 실현하는데 발판이 된 법입니다. 그동안 정보화나 정보산업정책은 각 부처별로 분산돼 정책과 예산 중복이 많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국가정보화 사업 추진체계를 정비한 게 바로 이 기본법입니다.”
이 법이 제정되기까지는 정권을 건너뛰어야 했다. 만 3년 이상이 걸렸다. 노태우 정부시절 처음 정보산업 육성을 위해 `국가전략계획`을 수립한 것이 시발점이다. 이후 김영삼 정부가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면서 최종적으로 정보화촉진기본법안으로 결실을 보게 됐다. 긴 여정이었지만 IT강국 건설이나 국가정보화를 위해 꼭 필요한 법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처 간 견제와 반대, 대립과 갈등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세월을 거슬러 노태우 대통령 정부시절로 올라가 보자.
1992년 7월 22일 청와대.
노 대통령은 이날 낮 청와대에서 각종 소프트웨어 공모전 수상자, 제품 개발자 및 전산전문가, 교수, 학생 등 정보산업전문인력 70명을 초청, 오찬을 함께하며 격려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보산업의 획기적 진흥을 위해 관계부처, 연구소, 대학, 산업계의 전문인력으로 구성되는 정보산업 기획단을 부총리 밑에 설치해 정보산업 중장기 발전계획을 연말까지 작성, 보고하라”고 최각규 부총리(강원도지사 역임, 현 현진그룹경영고문)에게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우리기술로 개발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보급 확대를 위한 지원책을 마련해 추진하고 특히 정부 각 부처와 정부투자기관이 전산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민간산업에도 기회를 개방, 민간의 소프트웨어산업이 진흥되도록 지원하는데 역점을 두라”고 강조했다.
1992년 8월 28일 오전 경제기획원 회의실.
노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최각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이날 교육 · 상공 · 체신 · 과기처 등 관계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보산업육성을 위한 회의를 주재했다.
이날 회의에서 정보산업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정부는 이를 위해 관련부처 실무국장급과 민간 전문가들로 정보산업 실무기획단을 구성키로 했다. 단장은 강봉균 경제기획원차관보(정통부 장관, 대통령경제수석, 재정경제부 장관 역임, 현 18대 국회의원)가 맡기로 했다. 기획단은 산하에 △총괄반 △소프트웨어반 △정보기기대책반 △정보통신대책반 △정보인력대책반 등 5개 작업반을 두기로 했다.
이들이 정보산업 발굴을 위한 과제를 발굴하고 범 정부적인 지원체제를 구축하며 재정지원 계획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이즈음, 선경의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특혜설이 제기됐다. 특혜설은 정국에 뇌관으로 등장했다. 체신부는 1992년 8월 20일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대한텔레콤을 선정했다. 노 대통령과 사돈관계 기업인 선경이 대주주인 컨소시엄이었다. 야당은 일제히 청와대의 특혜라며 공세를 폈다. 여기에 김영삼 민자당 대표까지 사업자 선정에 불복을 선언했다.
체신부는 곤혹스러웠다. 체신부가 투명하고 공정하게 사업자를 선정했건만 마치 특혜를 준 것처럼 야당이 각종 의혹설을 유포하고 여기에 일부 언론이 동조하고 나서는 바람에 난감했다. 사업자 발표에 앞서 양정규 국회교체위원장(현 대한민국헌정회장)과 강삼재 의원(한나라당 사무총장 역임, 현 대경대학 총장) 등이 당정협의에서 사업자 결정을 차기 정부로 넘기자는 의견을 냈으나 청와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진설 대통령경제수석(건설부 장관, 서울산업대 총장 역임, 현 센트럴씨티 회장)은 이에 대해 “이동통신사업을 연기할 수 없다. 내년에는 통신시장이 개방돼 늦추면 늦출수록 한국시장은 외국에 잠식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노 대통령의 수용불가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김영삼 후보 대선캠프에 속했던 A씨의 증언.
“김 후보는 대선을 앞두고 특혜 의혹설이 확산되는 것을 가장 우려했어요. 당락에 결정적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어요. 김 후보는 노 대통령과 `공조냐 차별화냐`를 놓고 고심하다 결국 홀로서기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입니다. 이 바람에 후폭풍이 거셌고 노 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했어요.”
이 문제는 현재 권력인 대통령과 미래권력이 충돌하는 사태로 번졌다. 선경은 급기야 8월 27일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건은 추후 상세하게 기술한다). 하지만 선경에게는 그런 결단이 뒷날 전화위복이 됐다.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지금의 SKT를 소유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후보는 1992년 11월3일 `신한국창조`를 위한 대선공약을 발표했다. 10대과제 77개 공약이었다. 민자당 정책위원회는 공약을 발표하면서 정보산업육성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법을 제정한 후 정보산업 육성기금을 설치해 첨단정보기술 개발을 촉진하며 소프트웨어 등 정보처리관련 산업을 제조업 차원에서 지원한다고 밝혔다.
김 후보 측은 무역정보화와 유통정보화를 추진하고 중소기업 생산활동을 정보화하며 정보통신요금의 감면과 할인 등 요금체계도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정보통신시설을 확장 보급하고 1998년까지 1000만대의 컴퓨터를 보급하며 행정과 국방, 교육, 국방, 공안 등 5대 국가기간 전산망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14대 대통령 투표일을 4일 남겨둔 1992년 12월 14일.
당시 정국은 초긴장 상태였다. 과연 누가 14대 대통령이 될까. 국민은 대권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오전 9시 청와대에서 `정보산업 국가전략계획보고 회의`를 주재했다. 노 대통령은 “정보산업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초중등 교육과정에 컴퓨터 전담교사제를 도입할 수 있도록 전담교사 양성방안과 함께 정보과학고교 신설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최각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이날 재무 · 교육 · 상공 · 체신 · 과기처 등 관계부처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들 부처가 4개월간 공동으로 마련한 `정보산업 국가전략계획`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최 부총리는 보고를 통해 “앞으로 정보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선정해 범국가적 차원에서 정보산업을 집중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정보산업발전을 위한 핵심전략과제를 선정했다.
먼저 정보기기분야에서는 전자수첩. 핸디터미널 등 휴대형 소형컴퓨터와 기억장치, 프린터, 모니터 등 컴퓨터주변기기, 주문형반도체, 화합물반도체 등 반도체를 중점 개발하기로 했다. 정보통신분야에서는 고도전략통신망과 광대역통신망 구축과 함께 휴대형 전화, 무선호출 등의 무선통신망을 대폭 확충하며 1990년대 중반부터 이동전화망을 디지털방식으로 전환하고 제2세대 무궁화위성을 통해 고선명TV 등 첨단방송망을 구축키로 했다.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다양한 주문형 소프트웨어 생산이 가능하도록 국제경쟁력을 갖춘 소프트웨어 생산을 촉진하고 시장원리에 입각, 관련산업을 육성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런 핵심과제를 차질 없이 추진해 오는 2001년까지 컴퓨터 보급대수를 1000만대 수준으로 늘리고 체신부와 통신사업자가 실시 중인 구매예고제도를 공공기관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와 함께 연간 1000명의 고급 IT전문 인력을 교육시킬 수 있는 특별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정보과학고교 신설을 통해 IT인력을 육성하기로 했다.
이밖에 소프트웨어와 부가통신업에 대해서는 제조업 수주의 세제 및 금융 지원을 하고 공공기관 등이 불법 소프트웨어 사용을 근절하기로 했다.
막바지 대선 정국이 거센 파도처럼 전국에서 요동치고 있었지만 정부는 정보산업을 2000년대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해 나간다는 의지에 추호의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 주도권을 당시는 경제기획원이 쥐고 있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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