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6> CDMA 단일표준

`CDMA냐, TDMA냐.`

PCS 접속방식을 놓고 정보통신부는 고심했다. 선택지는 단일표준 아니면 복수표준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푸는 일보다 더 어렵고 힘들었다. 최우선 고려사항은 국익이었다. 과연 어느것을 선택해야 IT강국으로 갈까.

1995년 10월 20일.

정보통신부는 이날 PCS 기술방식을 CDMA 단일표준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장맛비처럼 길고 지리한 CDMA 기술표준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승리의 여신은 CMDA에 최종 미소를 보냈다. 정보통신부가 고심 끝에 내린 선택은 세계 최초를 향한 CDMA 상용화의 길이었다.

이 선택은 한국이 세계 IT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분수령이 됐다. 가정이긴 하지만 당시 정통부가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한국은 IT강국의 기치를 내걸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CDMA 단일표준 선택이 한국 이동통신산업의 획기적인 도약을 이뤘고 한국은 그 여세를 몰아 IT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CDMA 개발은 기술낙후국인 한국에 피어난 희망의 싹이었다.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숱한 고비와 곡절이 뒤따랐다.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의 회고.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통신 비중이 당시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지만 정보통신부 입장에서 CDMA 개발은 지상 과제였습니다. 당시 국회와 업계 등에서 PCS 방식을 놓고 논쟁을 벌였지만 정부는 1000여억원을 들여 국책사업으로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CDMA 기술을 도입했고 기술개발을 지휘했으며 디지털이동통신기술방식을 CDMA 방식으로 결정할 당시 차관으로 일했던 경 장관은 자리를 걸고 이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한승수 대통령비서실장의 이런 방침을 재고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그런 요청을 받아 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CDMA단일표준을 둘러싼 뒷이야기를 다시 다루기로 한다)

정보통신부 이날 기간통신사업 허가계획 2차 시안을 발표하면서 “경제성과 기술발전 가능성, 장래성 등의 측면에서 CDMA가 TDMA보다 우수한 것으로 판단해 국내 PCS 방식을 CDMA로 확정했다”고 못을 박았다.

정보통신부는 또 업계 일각에서 끊임없이 제기한 CDMA와 TDMA의 복수표준안에 대해서는 “국내 기술개발능력이나 개발 기간 등을 감안할 때 두가지 방식을 모두 채택할 경우 기술인력 부족과 지금까지 1000여억원을 들여 애써 개발한 국내 CDMA 기술이 사장할 우려가 있다”며 밝혔다.

정홍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차관, LG데이콤부회장 역임)의 증언.

“정부가 PCS 접속방식을 CDMA로 단일화한 것은 우선 통화품질이 우수하고 가입자 수용용량이 크며 서비스 제공영역이 넓어 경제적으로 통신망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복수표준을 선택할 경우 국민 선택의 폭은 넓어 질수 있으나 단말기 간 호환성을 확보하기가 어렵고 한정된 국내 개발자원이 분산돼 관련 기술의 적기 개발이 불가능하며 이미 개발한 CDMA기술마저도 사장될 우려가 있었습니다(`한국IT정책 20년`에서).”

정보통신부는 단일표준 방식과 더불어 사업자선정 방법과 관련해 △서비스 제공계획 △설비규모 △재정 능력 △기술개발 실적 및 기술개발계획 △기술계획 및 기술능력 △신청 법인의 적적성 등 6개 심사사항별 배점을 포함한 1차 심사기준을 발표했다.

배점은 기술개발 실적 및 기술개발계획에 30점, 기술계획 및 기술적 능력과 신청 법인의 적정성에 각각 20점, 나머지 사항에 각각 10점을 배정했다.

1차 심사에서 각 심사사항에 대해 60점 이상(100점 만점), 전체 평균 70점 이상을 받아야 2차 적격업체로 판정돼 2차 심사(출연금)을 받게 했다. 2차 시안에서 사업자수는 국제전화 1개와 PCS 3개, TRS 10개(전국1개, 지역 9개), CT-2 11개(전국1개, 지역 10개), 무선데이터 3개(전국), 무선호출 1개(지역)이었다.

정부의 단일표준 방식을 발표한 김창곤 기술심의관(정통부차관, 한국정보사회진흥원장 역임, 현 LG유플러스고문)의 증언.

“1년간의 미국 콜럼비대학연수를 마치고 1995년 8월 하순에 귀국해 두 번째로 기술심의관으로 일하게 됐어요. 국내에서 CDMA와 TDMA를 놓고 단일표준과 복수표준을 놓고 논쟁이 치열했습니다. 여기에 이미 CDMA 방식을 조건으로 제2 이동통신사업자 허가를 받은 신세기통신까지 접속방식 논쟁에 가세했어요. 사태를 더 악화시켰어요.”

잠시 그 무렵, 국내 사정을 알아보자.

당시 PCS 방식을 놓고 한국통신과 한국이동통신 등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두 회사는 각기 다른 기술방식의 사업을 추진했다. 아이러니 한 점은 한국이동통신이 CDMA 방식을 주장한 반면 국가 중추 통신사업자인 한국통신은 TDMA 방식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한국통신과 한국이동통신이 기술방식을 놓고 갈리자 장비업체와 단말기 제조업체 등까지 이 논란에 가세해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삼성전자와 LG정보통신, 현대전자, 맥슨 등은 CDMA 방식을 주장했고 대우통신 한화전자정보통신 등은 TDMA 방식을 선호했다.

한국통신은 “CDMA보다 TDMA 방식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한국이동통신은 “국책과제로 선정돼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들인 CDMA 기술을 국가표준으로 삼는 게 당연하다”고 맞섰다.

그 당시에 CDMA 방식을 단일표준으로 결정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 상용화 한 일이 없어 일부에서는 시스템의 안정성이나 경제성 등에 우려를 제기했다.

한국통신 측은 “TDMA는 이미 검증된 기술로 보편적 서비스를 실현할 수 있고 해외시장 진출도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이동통신 측은 “TDMA를 도입하면 국내 통신시장을 외국업체에 내줄 수 있다”며 “CDMA를 하루 빨리 상용화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여기에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지낸 칼라힐스가 정부에 신세기통신의 아날로그방식을 허용해 줄 것을 한국 측에 요구했다. 그는 당시 미국 에어터치 법률고문을 맡고 있었다. 에어터치는 신세기통신의 외국인 최대주주로 주식 11.4%를 갖고 있었다. 그는 청와대와 경제기획원, 상공부 등을 오가며 압력을 넣었다. 신세기통신의 말바꾸기에 정보통신부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신세기통신은 사업권을 신청할 당시 “국내 개발 CDMA로 서비스를 시작하겠다”는 조건을 달아 계획서를 제출했다. 정부는 이런 조건을 허가기준으로 삼아 신세기통신에 제2 이동통신사업권을 허가했다. 그런 신세기통신이 CDMA가 아닌 아날로그로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겠다니 정보통신부의 속이 편할리 없었다.

김 기술심의관의 회고.

“신세기통신 측의 주장은 `CDMA상용화가 1년 6개월 후에나 가능한데 그렇다면 대안으로 아날로그를 사용하게 해달라는 것이 핵심이었니다. 신세기통신의 미국인 기술이사가 미국 에어터치에 이런 내용의 장문보고서를 보냈다고 해요.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해법을 ?지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기술심의관실은 신세기통신 측 주장을 취합해 당시 CDMA 상용화시험을 하던 서울 삼성동의 4개 기지국을 돌며 시험을 했다. 신세기통신은 핸드오프(hand off)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김 심의관과 신용섭 연구개발과장(현 방송통신위원회 방통융합실장) 등은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직접 차량을 타고 시험한 결과 문제는 있지만 3개월가량 주야로 노력하면 99%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김 기술심의관은 1979년 12월 사무관시절 서울 영동과 당산전화국에 국내 처음으로 벨기에 BTM사가 턴키방식을 설치한 전자교환기(M10CN)의 공사를 관리한 경험이 있었다.

기술심의관실은 경우의 수를 검토한 결과 PCS 방식을 단일표준으로 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정홍식 실장과 이계철 차관, 경상현 장관 등에게 단일표준으로 가야한다고 건의했다. 그리고 이런 방침을 결재까지 받았다. 김 심의관은 가장 현안이었던 한국통신의 CDMA 방식 전환방침도 이끌어냈다.

당시 기술심의관실이 단일표준 결론을 내린 실증적 근거는 또 있다.

TDX국산화 시절의 사례다. 당시 TDX는 외국부품을 수입해 조립하면 부품가격과 운송비, 개발비, 일반관리비 등에 17%를 더 주었다. 반면 국산 개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내업체들은 국산개발은 피하고 외국부품을 수입해 조립생산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정부가 CDMA와 TDMA를 복수표준으로 결정한다면 결론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모든 기업들이 손쉽고 이윤이 많은 외산을 수입해 조립생산을 하지 어려운 CDMA개발에 나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책사업으로 1000여억원을 들여 세계 최초 상용화를 노리던 CDMA는 사장되고 말 것이 틀림 없었다.

정보통신부는 이런 전반적인 사항을 국익차원에서 검토해 PCS 방식을 CDMA 단일표준으로 확정 발표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정부는 1993년 6월 윤동윤 체신부 장관이 CDMA를 디지털이동전화 기술표준으로 확정한 바 있다. 윤 장관은 재임시 CDMA 개발에 장관직을 걸 정도로 기술개발에 역점을 두었다.

이와 관련한 윤장관의 기억.

“우리가 TDMA 방식을 도입하면 우리는 기술종속국으로 전락한다고 판단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CDMA 기술을 개발한다면 우리가 기술종주국의 자리에 오릅니다. 당시 결재서류에 디지털이동전화 기술표준은 CDMA로 한다는 내용이 빠져 있기에 그 내용을 다시 넣도록 해 결재했습니다.”

이 결정이 뒷날 미국 측의 신세기통신에 대한 TDMA 방식 요구의 방패막이가 될 줄은 그 당시는 아무도 몰랐다. 허가 조건과 다른 방식으로 서비스를 하면 사업권을 반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표준방식은 국회 통신과학기술위원회(위원장 장경우)의 국정감사 등에서도 끊임없이 쟁점이 됐다. 독자기술이란 열매를 얻으려면 국가적 이익과 명분, 그리고 정책입안자와 연구진들의 확고한 개발의지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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