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례>벤처기업에서 시작해 10년 만에 매출 5000억원을 넘보는 회사로 성장한 전자부품 업체 A사는 요즘 신사업 투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기존 사업은 꾸준한 매출을 기록하며 수익성도 아직 좋은 편이다. 그러나 A사의 부품이 적용되는 세트제품의 수명주기가 성장기를 지나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어 신사업 발굴은 회사 명운을 결정하는 일이 됐다. 신사업 등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회사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지만, 과거보다 신규사업 투자 진행이 더욱 힘들어졌다. 중소기업 때는 연구개발 지원은 물론이고 전문 인력 지원까지 받았지만,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이런 지원들이 모두 끊겼기 때문이다. 외산 부품을 국산화해 중견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요즘은 다시 중소기업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이다. 신규사업 투자에 늦었다가는 IT산업 트렌드에 뒤처질 수 있어 A사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국내 중견기업들이 성장의 문턱에서 미끄러지고 있다. 가뜩이나 부실한 한국 경제의 허리가 더욱 취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중견기업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무관심이 이런 상황을 더욱 부채질했다.
대한상의 자료에 따르면 기술개발 역량 및 지원제도 미비로 국내 중견기업들의 매출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중은 1.8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3.1%)은 물론이고 중소기업(2.1%)보다 낮은 수치다. 연구개발 투자 비중이 낮으니 당연히 경쟁력 수준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중견기업들의 투자 의지도 소극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한국산업기술재단이 조사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견기업의 51.6%가 최근 3년간 연구개발 투자비를 현상 유지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또 상당수의 중견기업들이 신규사업 기획을 보류 중이라고 밝혔다.
취약한 기술 개발 역량과 지원제도 미비, 판로 개척의 어려움이라는 환경에 중견기업들의 소극적 투자 관행까지 더해지면서 `악순환 고리`가 이어지고 있다.
◇중견기업 육성해 첨단 부품·소재 원천 기술 확보해야=한국 경제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중견기업 육성이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중견기업 육성은 국가 산업구조 개편 및 무역수지 개선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IT 등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핵심 부품·소재에 대한 원천기술 확보가 필요하다. 이런 부분을 중견기업들이 상당 부분 담당해줘야 한다. 일본, 독일 등 선진국은 중견기업들이 부품·소재에 대한 원천기술을 확보해 국가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중소기업 지원제도 중 △산학연 공동 기술개발, 대학 및 연구소가 보유한 기술의 이전, 첨단장비의 활용 지원 등의 기술혁신 관련 지원시책 △이전받은 기술의 사업화에 필요한 시설자금 등을 지원하는 개발기술사업화자금 지원 △기업의 연구개발 비용에 대한 세제지원 등의 기술개발 역량 강화 지원제도를 중견기업에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견기업이 정부출연기관 및 연구소, 대학이 보유하고 있는 첨단연구장비를 활용할 수 있게 해 기술 역량을 확보하도록 돕자는 취지다. 중견기업이 보유하고 있거나 이전받은 기술의 제품화 및 사업화에 필요한 개발기술사업화자금 지원도 확대해야 한다.
부품·소재 중견기업이 연구개발 계획서를 제출하면, 정부와 금융기관이 공동으로 평가해 연구개발비 및 사업화를 지원하는 민관 연계 모델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연구개발 인력 지원으로 중견기업 경쟁력 강화 필요=침체된 국내 중견기업들에 연구개발 인력 지원을 해 경쟁력 강화를 돕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다행히 최근 정부가 중소기업을 벗어난 기업의 연구개발 인력 고용에 대한 보조 혜택을 마련하고 있지만, 선진국에 비해서는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중견기업이 신제품을 개발할 때 석·박사급 연구개발 인력 고용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 등 실질적인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전문연구요원제도(병역특례)와 산업 연수생을 활용하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전문연구요원제도는 중소기업에 연구개발 인력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대기업이 오히려 이 제도를 더 많이 활용하고 있다.
당초 취지를 살려 중견기업이 새로운 사업기회를 창출하고,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또 현행 제도 아래서는 중소기업 범주를 벗어나면 외국인 산업연수생을 활용할 수 없게 돼 있다. 이에 따라 중견기업은 인력 부족, 노동비용 상승 등의 부담을 감수하고 있다. 생산 인력을 제외한 연구개발 혹은 기술인력은 중견기업도 외국인 산업연수생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해당 기업에 적합한 인력 지원제도 수립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소비재를 생산하는 중견기업은 소비자 취향을 즉각 반영할 수 있는 전문 디자인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가 산업분야별 전문 디자인 인력을 양성하면서, 중견기업에 인턴십 및 취업지원까지 연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중견기업 판로 개척에도 지원 필요=중소기업과 마찬가지로 중견기업도 판로 개척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중소기업보다는 형편이 좋지만 중견기업이 새로 개발한 제품도 신뢰성이 높은 편은 아니기 때문에 대기업들은 선뜻 채택하기를 꺼린다. 중견기업이 연구개발 전에 대기업과 정보를 공유하고, 구매 등의 사항을 협의한 후 진행하는 R&BD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이때 중간에서 정부가 조정 및 중재 역할을 해야 한다.
중견기업을 글로벌 수출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지식경제부 등 정부기관과 KOTRA 등 수출지원기관의 단계별 맞춤 정책도 필요하다. △무역촉진단 파견 △해외바이어 알선 △해외지사화사업 등 중견기업의 수출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책들이 제시되고 있다.
품질 경쟁력은 갖췄지만 해외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낮아 시장 개척이 힘든 중견기업에는 브랜드 활성화를 지원하는 등 맞춤화된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
<박스> 독일의 중견기업
독일은 산업이 고도화되기 시작한 때부터 중견기업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고, 경제 전체에서 이들 기업의 역할에 주목했다.
독일의 중견기업은 독자적인 기술과 설계능력에 기반하고 있다. 해당 분야에서 높은 생산 집중도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며, 독점적 성격을 갖고 대기업의 구매독점에 대항력을 갖추고 있다.
특정 대기업에만 의존하지 않고 광범위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또 시장에서 가격 결정권을 보유한 경우가 많다.
독일은 중소기업을 크게 소기업과 중기업으로 나눠 정책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소기업은 종업원 수가 10명 미만이고, 연 매출액이 100만유로 미만인 기업이다. 중기업은 종업원 수가 10~499명이며, 매출액은 5000만유로 미만인 기업이다. 독일의 중기업은 우리나라의 중견기업과 종업원 수, 매출액 기준에서 일부 비슷하다.
중견기업 상한선은 약 1만명 직원 규모로 범주가 포괄적이다. 법률적으로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종사자 규모기준과 함께 회사 인지도와 지역경제에 대한 영향력 및 재정자립도 등을 고려해 중견기업을 선정한다.
독일은 기업의 성장단계별 특성을 고려해 체계화된 중견기업 정책을 진행하고 있다. 중견기업의 발전단계를 창업, 성장, 확장 3단계로 구분하고 맞춤 지원정책을 수립했다.
성장단계에 따른 지원정책은 기업의 경영특성을 고려해 전개한다. 성장단계에서는 혁신 능력의 지속적 유지와 신규 상품 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기업과 협력을 통한 정보공유와 인력 확보를 지원하고 있다.
확장단계에서는 글로벌 경쟁을 위한 첨단 기술개발에 대한 높은 위험부담과 자금문제를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