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2>
`선(先) 국내경쟁 후(後) 국제경쟁.`
한국 통신시장 개방의 정책 기조다. 이 원칙은 어느 정권, 어느 장관을 불문하고 손댈 수 없는 고정불변이었다.
한국통신시장의 문을 여는 데는 3번의 빗장풀이 단계를 거쳤다. 1990년 1차 통신사업 구조개편을 신호탄으로 1994년 6월의 2차, 그리고 정보통신부 출범 후인 1995년 7월의 3차 구조개편이다. 이런 구조개편 조치에 따라 국내 통신시장은 경쟁체제로 변했다. 시내전화를 비롯한 모든 통신부문에 자유경쟁 바람이 몰아 닥쳤다. 정부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시장개방 정책을 치밀하게 추진했다. 통신시장 개방은 기존 통신질서의 혁신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신시장 개발시기와 방법, 폭을 놓고 정책당국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한국 통신시장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문을 열게 됐을까. 잠시 통신사업구조 개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이 과정을 알아야 1995년 7월 이른바 제3차 구조개편 이후 국내 통신시장에서 벌어지는 `재벌들의 통신대전(大戰)` 드라마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영하의 날씨답지 않게 겨울 햇살이 따사하던 1980년 12월 19일.
김기철 체신부 장관(작고)은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통신사업 경영체제 개편`에 대한 재가를 받았다. 김 장관은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천주교평신도협의회장과 농림부 차관, 제헌의원, 3대, 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65년 정계를 떠나 하이파이사 사장, 한국수출진흥 고문 등을 지내다 5공 출범 후 재야에서 발탁된 사람이다.
이 방안이 통신사업 경쟁체제 도입의 시발점이다. 이는 한국통신사(史)에 일대 혁명적인 조치였다. 청와대 경제비서실에는 김재익 수석(작고)과 오명 과학기술비서관(체신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 과기부총리 역임, 현 건국대 총장) 홍성원 연구관(KAIST서울분원장, 현대전자 부사장, 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 회장 역임), 정홍식 행정관(정통부 차관, LG데이콤 부회장 역임)이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당초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민영화 시점은 1983년 1월 1일이었다. 하지만 오명 비서관이 공사 발족은 이르면 이를수록 더 좋다며 시기를 1년 앞당겨 1982년 1월 1일 출범했다고 한다.
민영화 기본원칙은 정부가 직접 운영하던 전기통신사업을 1982년 1월 1일부터 공기업체인 한국전기통신공사에 넘긴다는 것이다. 정부는 공사의 효율적 경영을 위한 조건도 마련했다. 먼저 인사의 자율성과 예산 및 회계의 탄력성도 보장했다. 회사 경영의 자율성과 책임경영, 공사화에 따른 직원 신분도 보장도 잇따랐다.
체신부는 직할기관 5개와 전신국, 전화국, 전신전화국, 전신전화건설국 등 현업기관 148개 등 153개 기관에 속한 직원 3만5222명을 한국전기통신공사 소속으로 이관키로 했다. 정부 수립 이래 최대 규모의 인사이동 이었다. 정부는 그해 3월 한국데이터통신(데이콤의 전신, 현 LG유플러스)도 설립했다.
1981년 3월 6일 전두환 대통령은 김기철 체신부 장관을 경질하고 후임에 최광수 전 대통령비서실장(주 유엔대사, 외무부 장관 역임)을 임명했다. 최 장관은 5월 1일 청와대에서 전 대통령에게 체신부 주요 업무를 보고했다. 전 대통령은 이날 “체신부는 대민서비스를 향상하고 국민의 불편을 해소하는데 역점을 두라”고 지시했다. 같은해 5월 말 오명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이 체신부 차관으로 승진, 발령 났다.
최 장관과 오 차관은 6만8000여명이던 체신부 직원의 공사 배치를 놓고 고심하다 인사원칙을 정했다. 그 누구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칫 잘못했다가는 엄청난 인사 태풍에 휘말릴 수 있었다.
당시 오명 차관은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체신부는 인사이동이 예고된 때부터 온종일 청탁전화에 시달렸다. 제발 우리 아들만은, 우리 조카와 사위만은 체신부에 남게 해달라는 전화였다. 나한테도 업무에 방해가 될 정도로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친척과 친구의 누군가가 전화를 해서 우리 아들을 부탁한다며 애원했다. 얼마나 많은 전화가 걸려오는지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몇 다리만 건너면 나와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자서전 `30년 이후의 코리아를 꿈꿔라`에서)
인사원칙은 현재 근무부서를 기준으로 전화와 관련한 부서는 모두 공사로 가고, 우편과 관련한 부서는 체신부에 남게 했다. 다만 업무가 전화인지 우편인지 애매한 부서나 체신청에 근무하는 직원은 개인의 희망과 경력을 감안해 결정하기로 했다. 또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55세 이상의 간부는 체신부에 남도록 했다.
최 장관은 이런 인사원칙을 조회시간에 발표하고 쓸데없는 인사청탁을 하지 말 것을 엄중히 당부했다.
“이 인사원칙에는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 인사청탁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불이익을 주겠습니다. 내 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오 차관의 계속된 술회.
“나도 딱 한번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다. 육사 동기생이 철모를 쓴 채 전방에서 지프차를 타고 나를 찾아 왔다. 자신의 매부가 공사로 가게 됐는데 안가도록 해달라며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흙먼지가 묻은 야전복 차림의 친구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그렇게 해 보마`고 말해 버렸다. 머리 속이 복잡했다. 어느날 장관실에 들어갔더니 책상 위에 인사청탁 메모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장관은 한 번도 그 청탁에 대해 아랫사람한테 처리를 부탁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전방에 있는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친구한테는 미안하지만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했다.”(자서전 `30년 이후의 코리아를 꿈꿔라`에서)
그렇다면 통신공사 설립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으며 이를 정책으로 밀어붙인 사람은 누구인가.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10년 이상 근무했던 정홍식 비서관은 `한국IT정책 20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통신공사를 설립한다는 아이디어의 근원은 미국 AT&T라고 말할 수 있다. 김재익 경제수석은 AT&T의 모범사례를 통해 통신공사 설립을 경제비서실의 정책 방향으로 채택한 것이다. 기계공업 중심이던 당시 한국 상황에서 전자산업을 육성하려면 탄력성이 적은 정부예산으로는 어렵고, 통신공사의 수요와 자금을 기반으로 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모두 기피하는 공사행을 자원한 사람도 있다. 이인학 전무국 수석과장(체신부 통신정책국장, 데이콤 감사 역임)이다. 그는 월급이 30%가량 더 많은 공사로 가길 희망했으나 최 장관과 오 차관이 “당신은 갈 수 없다”며 허락하지 않아 가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초대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은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낙점했다. 전 대통령은 이우재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임명했다. 그는 육사 13기로 전 대통령과는 육사 축구부시절부터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1980년 국보위 교체분과위원장과 입법회의 내무분과의원을 거쳐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11대 국회에 진출했다. 그는 국회교체위 간사였다. 그는 처음에 사장자리를 고사했으나 전 대통령의 지시로 부임했다. 그는 한국전기통신공사에서 7년간 장기 재임한 후 1989년 7월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1990년 7월 13일.
체신부는 이날 통신사업구조 조정안을 확정, 발표했다. 이른바 1차 구조개편안이다. 그동안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독점해 온 국제전화사업에 데이콤의 참여를 허용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나 데이콤에 허용키로 했던 시외전화 사업은 방침을 변경, 시장상황을 봐 가며 경쟁체제 도입을 검토하기로 당초 계획에서 한발 물러섰다.
체신부는 이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1989년 3월 20일 정보통신발전협의회를 구성했다. 신태환 전 서울대 총장(작고)을 위원장으로 학계와 산업계, 언론계 등 각계 전문가 96명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산하에 정보통신발전 중장기 계획과 경쟁정책, 서비스정책, 정보통신산업정책, 뉴미디어정책 등 5개 분야별 위원회와 조정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했다. 위원회는 그해 7월 말까지 모두 45회에 걸쳐 논의한 정보통신발전방안을 종합 건의서로 정리해 그해 11월 27일 체신부에 제출했다.
체신부는 이 건의서를 토대로 이듬해인 1990년 6월 15일 통신사업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이 안에 따르면 시내 전화는 현재와 같이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독점을 유지하되 국제 및 시외전화는 데이콤에도 경쟁을 허용, 요금인하와 서비스경쟁을 유도키로 했다. 체신부는 또 한국이동통신주식회사가 독점하고 있는 이동통신서비스에도 경쟁체재를 도입키로 했다.
정부의 이런 방안에 대해 18일 통신개발연구원에서 열린 공개토론회에서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섰다. 특히 기존사업자인 한국전기통신공사와 데이콤 측의 입장이 대립했다.
조병일 한국전기통신공사기획실장(한국이동통신 사장 역임)은 “이 정책은 공사의 이익을 데이콤에 나눠 주는 것이나 같다”면서 “수익이 나는 국제나 시외전화는 경쟁하고 연간 적자가 7000억원에 달하는 시내전화는 그대로 하라는 것은 부당한 조� 굡箚� 반발했다.
이에 대해 손익수 데이콤 상무(데이콤 사장 역임)는 미국과 일본의 예를 들면서 “경쟁체제를 도입해야 통신강국이 된다”며 “우리도 경쟁체제로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신부는 이런 양측의 의견을 수렴해 7월 13일 당초 안보다 후퇴한 최종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1990년 10월 부가통신사업의 경쟁을 앞당겨 정착시키기 위해 기존의 사업 승인제를 등록제로 변경했다.
데이콤은 1991년 12월 3일부터 미국과 일본, 홍콩 등 3개국을 대상으로 첫 국제전화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어 1993년에는 110개국 118개 지역으로 국제전화 서비스를 확대했다. 데이콤이 국제전화와 시와전화 사업자로 등장하자 당장 고객서비스가 달라졌다. 제3자 과금서비스와 요금 즉시 통보서비스, 001쿠폰, 002패밀리 등 할인 서비스가 줄줄이 등장했다.
이동전화 시장에 민간사업자 참여 허용은 곧 재벌들의 통신대전을 예고했다. 통신서비스사업은 재벌들에게 독점적 이윤을 보장해 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만큼 통신사업권 획득을 위한 재벌들의 사생결단식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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