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부, 그 시작과 끝] <7>YS는 정보화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중 ‘정보화 대통령’이 되고자 노력했다. 김 대통령은 신한국창조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 정보화라고 확신했다. 이에 따라 김 대통령은 정보화를 국정지표로 제시했고 1993년 12월 혁명적 조치로 평가받는 정부조직개편에서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로부터 한국은 IT 신화를 창출해 IT강국 인터넷강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1992년 11월3일. 14대 대선 레이스가 치열해 지고 있었다.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는 이날 신한국창조를 위한 ‘김영삼의 실천약속’이란 제목으로 10대 과제 77개 대선 공약을 국민 앞에 발표했다.

 민자당 정책위원회(워원장 황인성, 국무총리 역임)가 공약개발위원회를 구성해 분야별 정책세미나, 직능단체와 간담회, 현지실태 조사, 지방순회 정책 토론회를 개최해 대선 공약을 선정한 것이다.

 김 후보는 이날 ‘도약하는 과학기술’, ‘활기찬 경제’를 이룩하기 위해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며 ‘정보산업육성특별법’을 제정하고 청와대에 정보통신비서관을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김 후보가 발표한 정보통신분야의 6대 공약을 보자.

 가. 정보산업을 효율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정보산업육성특별법’을 제정, 운용한다.

  -정보산업육성 기금을 설치하고 첨단정보기술 개발을 촉진한다.

  -소프트웨어 등 정보처리 관련사업을 제조업 차원에서 지원한다.

 나. 정보산업 관련 행정조직을 정비. 강화한다

  -정부 내 ‘정보산업 발전기획단’을 운영하고 정보산업담당 대통령특별보좌관제를 신설한다.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개편한다

 다. 산업활동의 정보화를 촉진하기 위한 금융세제지원을 강화한다.

  -무역정보화, 유통정보화를 추진한다

  -중소기업 생산활동을 정보화한다.

 라. 정보통신요금의 감면과 할인 등 요금체계를 개편한다

 마. 정보통신시설을 확장, 보급하고 이를 고도화 시킨다.

  -정보통신망)(ISDN)구축, 종합유선방송망(CATV),통신망의 지능화 및 시외·국제 전화시설의 디지털화를 추진한다

  -1995년 통신방송위성인 무궁화호를 발사, 난시청지역을 완전 해소한다.

  -1996년까지 1228억원을 투입, 연차적으로 30만대의 교육용컴퓨터를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보급한다.

  -1997년까지 전국 군 지역에 무료 컴퓨터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시, 지방의 정보화를 확산한다.

  -1998년까지 1000만대의 컴퓨터 단말기를 보급, 1가구 1단말기 시대를 실현, 가정의 정보화시대를 촉진한다.

 바. 행정·금융·교육연구·국방·공안 등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을 계속 추진한다.

  -휴대용 무선전화의 이용을 보편화하여 98년까지 전국 어디서나 통화가 가능하도록 한다.

  -전국 우체국을 전산화, 지역단위 정보센터화해 지역 정보화를 촉진한다.

 

 김 후보의 경제 분야 공약은 한이헌 경제보좌역(청와대 경제수석, 15대 국회의원,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교장) 등이 주도해 만들었다. 교통체신 단체는 양정규 의원(국회 교체위원장 역임, 현 헌정회장)이 담당했다.

 대선공약 중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한다는 것이었다. 특정부처를 대선 공약으로 제시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민자당은 그해 8월 11일 33명의 위원으로 대선정책공약개발특별위원회(위원장 황인성)를 발족했다. 특위는 4개 소위윈회와 실무기획단으로 구성했다. 이들은 그해 10월말까지 분야별 대선공약을 개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경제 분야, 즉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는 업무는 제2소위원회 소관이었다. 2소위원장은 나웅배 전 경제부총리가 맡았다. 위원으로는 금진호(전 상공부장관), 이명박(현 대통령), 서상목(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만제(전 부총리), 김식(전 농림수산부장관), 박재윤 후보특보, 한이헌 경제 보좌역 등 7명. 쟁쟁한 멤버들이었다.

 김영삼 후보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했고 정보통신부 개편 공약을 주도했던 한이헌 경제보좌역의 증언.

 “김 후보는 민주화 투사로 정치나 통합의 리더십은 자타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경제나 정보통신분야는 잘 몰랐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정치만 했으니 모를 수밖에 없지요. 체신부는 우편배달이나 전화교환이란 인식이 강했어요. 정보화를 주도할 부처로 체신부는 적합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정보통신부 신설을 공약에 넣었습니다.”

 1992년 대선 당시 공약 기획에는 문민정부 출범 후 청와대 첫 정책수석으로 내정됐다가 장인의 전력이 문제가 돼 자신 사퇴한 전병민씨(현 한국정책연구원 고문)의 역할도 컸다. 그는 김 후보의 사조직인 ‘임펙트코리아’를 이끌었다.

 청와대 정무, 홍보수석과 문화체육부장관을 지낸 주돈식씨는 “그 팀이 선거를 지원하고 선거공약도 정리했다”고 증언했다.

 경제관료로 잘 나가던 한이헌 씨가 김영삼 후보의 경제가정교사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경남 김해 출신으로 행정고시 7회에 합격한 그는 경제기획원에서 줄곤 근무했고 1989년 조순 부총리(전 서울시장, 서울대 명예교수) 아래서 기획국장으로 일했다. 그는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제도 도입 등을 실무 지휘한 개혁파 관료였다. 노태우 정부는 당초 1990년 1월부터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는 방침이었다. 조 부총리는 이런 개혁정책을 힘차게 추진했다. 이런 정책에 민자당 이승윤 정책위의장과 경제계가 강력 반대했다. 그로 인해 1990년 3월 17일 경제 개혁을 주도하던 조순 부총리와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경질됐다. 그리고 경제 부총리에 이승윤 민자당 정책위의장이 발탁됐다.

 개각 며칠 후, 퇴근 무렵이었다.

 새로 부임한 이진철 차관(전 건설교통부장관) 이 한 기획국장을 불렀다. 이 차관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 머뭇했다.

 “무슨 일입니까?”

 “한 국장, 기획국장을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이번 인사가 문책성인데 실무국장인 한 국장에게 책임을 안 물을 수가 없소. 위에서 지침을 받았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전보시킨다면 그 결과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말이 안됩니다. 금융실명제는 제가 사무관, 과장 시절 강경식씨(전 부총리)나 차관님 등이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놓고 그걸 추진한 저를 문책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는 한국개발연구원(KDI)로 파견나가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민자당 경제 전문위원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경제기획원을 떠나 1990년 4월부터 민자당 전문위원으로 나갔다.

 2급에서 1급으로 직급은 올라갔으나 그한테는 좌천이었다.

 이 무렵 대선을 앞두고 경제 분야가 취약한 김 후보 측은 경제 가정교사를 물색하다가 김 후보의 경남고 후배에다 경제 기획원 기회국장을 역임한 그를 적임자로 발탁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김 후보의 경제가정교사역할을 하게 됐다.

 “시내 사무실에서 경제현안을 보고하면서 토론을 했습니다. 대권 경쟁이 치열해진 1991년부터 정례화 했어요. 그 때 김 후보에게 정보화에 대비해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산업을 육성해야 하며 그러자면 체신부의 기능을 정보통신산업 육성에 맞게 정보통신부로 개편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후보는 1991년 가을 한이헌을 당대표 경제특보로 임명했다. 1992년 대선 때는 경제보좌역으로 기용했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실세로 경제 공약개발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 취임 후 1994년 12월 정보통신부가 출범할 때까지 나름대로 정보화를 앞장서서 추진했다.

 1993년 6월 15일.

 김 대통령은 6월 정보문화의 달을 맞아 관련 유공자를 청와대로 초청, 칼국수로 오찬을 함께 하면서 정보화에 대한 자신의 강한 의지를 밝혔다.

 김 대통령의 육성 증언을 들어보자.

 “이제는 기술전쟁시대, 정보혁명의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아무리 큰 기업도 정보화 없이는 살아 남지 못합니다. 기술과 정보화가 곧 선진국의 척도입니다. 정보화를 촉진하려면 정보산업 육성이 중요합니다. 나는 정보화야 말로 신한국 창조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전략의 하나로 봅니다.”

 체신부나 IT유관단체, 기업들은 이보다 더 반가울 수 없는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1993년 10월 29일.

 청와대 비서실은 이날 사무용 컴퓨터를 XT급에서 AT386급으로 교체하는 한편 대통령 집무실에도 개인용 컴퓨터를 설치했다고 발표했다. 청와대는 그해 6월 1일부터 하이텔에 ‘청와대 큰마당’이란 코너를 마련해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정부정책에 대한 국민의 여론을 수렴했다. 청와대는 그해 10월 17일 데이콤의 천리안에도 가입해 대통령 동정이나 사진 등을 서비스했다.

 김 대통령은 집무실에 컴퓨터를 설치한 후 “우리는 전산화와 정보통신 분야가 외국에 비해 뒤졌다. 앞으로 정보화를 위해 나도 서툴지만 컴퓨터를 공부하고 사용하겠다”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그해 6월 14일 1994 월드컵 선수단에 이메일로 격려편지를 보냈다. 천리안에 개설한 ‘94월드컵의 필승을 위하여’ 코너의 ‘격려편지 보내기’를 이용해서였다. 이런 성원에 힘입어 그해 10월 28일 한국 축구는 월드컵본선 진출 티켓을 거머쥐었다. 한국 축구팀은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94월드컵 축구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에서 북한을 3대0으로 제압했다.

 김 대통령은 정보화 대통령이 되고자 노력했고 정보화에 대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실제 김 대통령은 1993년 7월 3일 발표한 신경제 5개년 계획에 정보화촉진과 정보산업육성을 적극 반영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대통령의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한국을 IT강국 인터넷강국으로 도약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세상에 도전 없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현덕 IT칼럼니스트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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