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수정법안이 지난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수많은 논란을 낳았던 세종시 문제는 우여곡절 끝에 원안대로 행정부처 이전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남은 과제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수도 분할에 따른 비효율 문제를 최소화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관점을 바꾸면 행정기관의 세종시 이전은 국내 ICT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세종시 원안에 따르면 충청남도 연기군 일대에는 `9부2처2청` 등 35개 중앙행정기관이 오는 2012부터 2014년까지 단계별로 이전하고 교육·문화·복지시설을 갖춘 인구 50만명 규모의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들어서게 된다.
노무현 정부는 세종시 건설을 수도권 과밀화를 막고 낙후된 지방의 균형발전이란 대의명분으로 시작했다. 반면에 이명박 정부는 행정부처가 옮겨감에 따른 공백과 비효율을 지적하며 자족기능을 갖춘 경제도시로 수정하려고 했다. 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사실상 수도 분할은 피하기 힘든 현실이 됐다.
국회에서 부결됐지만 여권 핵심부는 세종시 원안이 잘 추진되도록 협조할 생각이 별로 없는 듯 하다. 원안이 부결됐으니 충청권은 과학비즈니스벨트도 포기해야 할 것이란 감정섞인 발언도 공공연히 나온다. 이 상태로 가면 2년 뒤 세종시는 별 특징도 없이 정부 예산만 축내는 업둥이, 무늬만 행정도시로 출범할 가능성이 높다.
공사 주체가 마지못해 추진하는 세종시 건설사업에서 거주자(공무원)의 편의와 효율성을 고려하는 ‘진심’이 작용할 여지는 적다. 여권 일부에선 차기 대선에서 주말이면 텅텅 비는 세종시의 황량한 모습을 적극 부각시키는 편이 더 유리하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만약에 세종시가 막대한 예산투자에도 실패한 행정도시가 된다면 충청도민은 물론이고 국가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제 정부가 할 일은 세종시가 원안대로 자리잡도록 성심껏 정책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비록 야당의 반대로 행정조직을 둘로 나누지만 막상 세종시 사업이 성공할 경우 이명박 대통령은 국토균형발전이란 진보진영의 가치를 선점한 지도자로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
◇서울과 세종시의 실제 거리는 얼마인가=지도를 펼쳐보면 서울과 세종시는 직선거리로 약 125㎞ 떨어져 있다. 혹자는 이 거리가 너무 멀다. 혹자는 멀지 않다면서 서로 다투는 것이 세종시 논란의 핵심이다.
세종시 원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두 도시를 연결하는 125㎞의 지리적 격차가 국가행정에 커다란 비효율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장·차관들은 사안별로 대통령이나 국회에 보고하거나 결재를 받을 일이 무척 많다. 실무 담당자들도 국정감사·국정보고회·대책회의 등으로 하루종일 불려다니는 경우가 있다. 옮겨갈 정부부처 공무원 상당수는 세종시로 이사하지 않고 주말부부나 서울에서 출퇴근할 전망이다.
공무원들이 서울과 세종시를 오가면서 도로정체는 심해질 것이다. 수도권 민원인이 세종시 담당부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시간과 비용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반면에 세종시 원안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KTX를 타면 세종시에서 서울역까지 1시간, 자동차로 2시간이면 충분하다. 기존 과천청사에서 광화문 정부청사까지 1시간 남짓 걸리는 것과 비교하면 세종시와 서울 사이의 125㎞가 주는 거리감은 큰 차이가 없다고 반박한다.
인터넷과 온라인 업무처리가 발달한 세상에서 시스템만 잘 갖추면 굳이 서울까지 올라가 결재를 받고 업무협의를 할 필요성은 점점 낮아질 것이다. 선명한 HD급 영상회의를 활용하면 직접 머리를 맞대고 협의하는 것과 진배없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수도 분할에 따른 불편함과 낭비요소도 있겠지만 지방 균형발전이란 더 높은 차원의 긍정적 효과를 고려하면 충분히 감내할 수준이다.
양측의 주장은 팽팽히 맞서지만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 크든 작든 수도 분할에 따른 국가행정의 비효율성은 반드시 발생한다는 점이다.
여권은 세종시 원안의 비효율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의 수도 분할을 예로 든다.
독일 정부는 총 14개 부처 중 베를린-8개, 본-6개로 분할 배치했다. 독일의 베를린과 본은 직선거리로 594㎞에 달한다. 독일은 본에 소재한 부처 장관들이 대부분 회의참석을 위해 594㎞ 떨어진 베를린의 사무소에서 상주하는 실정이다. 연방공무원의 잦은 출장에 따른 경비 및 시간낭비가 많고 행정조직과 의회 간 의사소통의 비효율성도 드러난다.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고자 모든 부처에 영상회의실을 설치했지만 행정기관 특유의 경직된 조직문화 때문에 영상회의 활용도는 여전히 낮은 실정이다.
한국도 세종시로 행정부처들이 이동하면 독일과 유사한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서울-세종시는 베를린-본의 물리적 거리에 비해서 5분의 1 남짓하기 때문에 수도 분할에 따른 불편함은 독일보다 훨씬 덜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경우 수도 분할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현 단계에서 정확히 계산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점차 줄어들 것인지 또는 현 상태를 유지할 것인지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어느 나라든지 수도 분할에서 거리문제는 극히 민감한 사안이다. 하지만 수도와 행정도시 간의 물리적 거리를 인식하는 공무원, 국민의 태도(거리감)는 시대에 따라 분명히 달라져 왔다.
경부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에 서울과 충청권은 그야말로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KTX 고속열차도 인터넷 인프라도 없던 지난 1980년대라면 서울과 세종시가 그리 멀지 않다는 주장은 헛소리로 치부됐을 것이다. 웬만한 직장인은 자가용을 몰고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요즘 세상에 직선거리 125㎞는 극복하기 힘든 지리적 제약조건이 아니다.
향후 교통과 통신서비스의 발달에 따라 국민들이 느끼는 서울-세종시의 거리감은 지금보다 점점 줄어들 것이 확실하다. 어차피 세종시 원안을 추진한다면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서울과 세종시의 거리감을 좁힐 기술, 제도적 대안을 서둘러 마련하는 것이다.
◇서울과 세종시를 잇는 IT생태통로를 만들자=고속도로나 포장된 산중도로를 달리다 보면 산 중턱에 작은 다리, 도로 밑에 터널이 뚫린 현장을 볼 수 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이곳은 야생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안전하게 장소를 이동하도록 만든 생태통로다.
도로 확장으로 좁은 서식지에 갇힌 동물들에게 생태통로는 먹이가 풍부한 바깥 세상으로 통하는 생명선이다.
문제는 바로 옆에 안전한 생태터널이 있는데도 야생동물들이 굳이 위험한 고속도로에 뛰어들어 로드킬을 당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원인은 인간이 생태터널을 만들면서 그 시설을 이용할 동물들의 고유한 습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날림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고라니·너구리 입장에서 아무리 굶주려도 내키지 않는 장소에 뚫린 시멘트 통로는 피하기 마련이다. 대신에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 위를 뛰어다니는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된다.
사람이 행동하는 방식도 야생동물과 큰 차이가 없다. 세종시 원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현재 영상회의와 전자결재로도 해결되지 않을 사안이 많기 때문에 사적인 대면보고를 위해 서울과 세종시를 오가는 공무원의 숫자는 줄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이다.
한국식 행정문화에서 윗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아랫사람에게 상당한 불편을 감수하게 만드는 성향이 있다. 감히 국회의원이, 장차관이, 청와대 수석이 지시하는데 이메일이나 전화로 보고하고 끝내는 것은 불경스럽다는 권위적인 행정문화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제는 생각을 한번 바꿔보자. 공무원의 권위의식과 은밀한 대화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행정효율을 극대화하는 멀티미디어 전자결재시스템을 만들 수 없을까. 공무원들이 억대의 영상회의 시스템을 두고도 좀처럼 쓰지 않는다면 심리적 저해요인을 찾아내 서울-세종시에 새로운 IT생태통로를 뚫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고급 공무원이 겨우 몇 분의 대면보고와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 행정부처 이곳저곳을 하루종일 돌아다는 모습은 고속도로를 위험하게 넘나드는 너구리의 행태와 흡사하다. 국가적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서울 광화문 청사와 세종시 청사가 마치 옆 건물처럼 느껴지도록 심리적 거리감을 소멸시키는 프로젝트가 시급하다.
심리학자와 건축가, 3D 홀로그램 개발자, 광통신 전문가, 모바일앱 개발자, 로봇전문가 등을 총동원해서 인간의 습성에 맞춘 IT생태통로를 만들어보자. 수도 분할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예상보다 크게 줄일 수 있다.
국내 정보통신산업은 세종시 IT생태통로 프로젝트를 통해서 한 단계 도약할 것이다. 경제학자 케인즈는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죽고 없다’고 말했다. 구세대의 관점에서 21세기 행정수도의 한계를 미리 예단하는 실수는 하지 말자.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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