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와인을 만들려면 하늘과 땅, 사람(天地人)의 조화가 필요하다. 적절한 토양과 온화한 기후, 땀과 정성으로 포도를 키우고 술을 빚는 사람들이 합쳐져야 향기로운 와인이 탄생한다. 우리나라는 와인 생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지만 첨단 IT를 통해 세계 와인시장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IT 기반의 포도재배와 양조가 성과를 거둔다면 언젠가 한국산 와인이 세계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날도 올 것이다.
지난 2005년 이희상 운산그룹(동아원) 회장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러더포드 지역에서 입지조건이 뛰어난 와이너리 한 곳을 인수했다.
와이너리에는 불교용어로 모든 것을 준다는 뜻의 ‘다나(DANA) 에스테이트’란 동양적인 이름이 붙었다. 이 회장은 포도원과 양조 시설 등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와인 컨설턴트인 필립 메카를 영입하는 등 최상급 와인을 만드는 데 주력해 왔다.
자존심과 텃세가 강한 나파밸리 와인업계에서 한 식구로 인정받기 위해 지역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지역 유력인사를 초청해 한국요리와 고급 와인으로 근사한 연회를 열면서 아시아 기업가가 자기과시를 위해 와이너리를 소유했다는 오해를 불식시키려 무던히 공을 들였다.
와인의 품질은 해마다 향상됐고 평판도 좋아졌다. 다나 에스테이트에서 만든 2007년 빈티지 와인은 저명한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받아 와인시장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언론매체에서 한국인이 만든 와인이 세계 최고로 평가받았다며 흥분했지만 국내 굴지의 종합식품그룹을 운영하는 이 회장은 만족하지 않았다. 포도원이 미국에 있고, 포도경작과 와인양조 책임자가 모두 외국사람인데 한국자본이 들어갔다고 해서 한국인이 만든 와인은 아닌 것이다.
그는 와인제조공정에 첨단 IT를 접목시킨 똑똑한 와이너리를 최초로 구현해 세계 와인시장의 벽을 넘는다는 원대한 계획을 시작했다.
◇스마트 와이너리=와인을 위한 포도재배와 양조과정은 대규모 농업이 아니라 전통 장인의 영역에 속한다.
고가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해진 매뉴얼이 아니라 오랜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서 습득한 장인의 노하우가 필수다. 남미, 호주와 같은 와인 신흥국가에서 고급와인을 만들 때도 프랑스의 와인전문가를 초빙해 지도를 청하곤 한다. 당신이 유럽의 명문 와이너리를 소유한다고 해도 명품와인이 절로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포도를 재배하고 양조하는지 노하우를 직접 알지 못하면 포도밭의 특성을 이해하고 밤낮으로 돌보는 기술자가 떠나는 순간 고품질의 와인 생산이 어려워진다.
운산그룹의 주력회사인 동아원은 지난해 9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함께 포도재배에 USN을 접목시킨 ‘스마트 와이너리’ 솔루션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포도 등을 재배할 때 USN을 활용해 작물 생장을 분석하고 생장환경을 제어하며 품질·생장 이상을 예측하는 것이다. 숙련된 장인이 담당해온 와이너리의 관리노하우를 자동화시켜서 와인의 생산량과 품질을 더 높이려는 시도다.
미국과 남미, 호주 등 와인 신흥국가에서는 와이너리의 재배 효율화를 통해 포도 생산량을 늘리고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연구개발을 꾸준히 해왔다. 그 결과 포도밭에 자동으로 물을 주는 관수시스템과 온도, 습도 등을 측정하는 장비는 웬만한 와이너리에 보급된 상황이다.
동아원과 ETRI는 이보다 더 나아가 포도밭의 모든 생장조건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장인이 담당하던 미세한 판단영역까지 자동화하는 솔루션을 2013년까지 상용화하기로 했다.
ETRI의 연구진은 우선 미국 나파밸리의 다나 에스테이트로 날아갔다. 포도밭을 골라서 온도와 습도, 일조량, 급수 상황을 24시간 정밀하게 측정하고 제어하는 센서망을 설치했다. 변덕스러운 날씨로 새벽에 포도밭에 서리가 내릴 것 같으면 대형 온풍기가 자동으로 작동해서 냉해를 막아준다. 다양한 정보가 한곳에서 수집되고 지금 포도밭 어느 구역에서 생장 이상(질병, 재해)이 감지되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도 자동으로 알려준다. 현재 대부분의 와이너리는 포도나무에 물을 제어하는 관수시설을 원격제어할 수 있지만 변덕스러운 날씨에 맞춰서 미세조정하거나 생장의 이상징후까지 감지하지는 못한다.
천지인 중에서 사람이 제공하는 최적의 생장조건을 제공받은 포도나무는 당도가 높고 더 풍성한 포도수확을 안겨주게 된다. USN 기반의 스마트 와이너리 솔루션은 포도의 생산량과 품질을 정확히 예측해서 유리한 조건으로 와인메이커와 거래할 수 있는 부수적 효과도 있다. 계획이 성공하면 와인 재배에서 경작자의 경험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아져서 와인 후발국에서도 수준급의 와인 생산이 용이해질 전망이다.
표철식 ETRI 부장은 “와이너리의 생장환경을 모니터링하는 기술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양한 센서모듈을 통합해서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똑똑한 와이너리는 대한민국이 최초로 구현해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ETRI는 포도재배에 이어 와인 발효과정을 자동으로 관리하는 기술도 개발할 예정이다. 동아원과 ETRI는 이를 위해 2013년까지 총 51억원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다. 국내 USN기술로 와이너리에 적용 가능한 고부가가치 솔루션이 개발되면 특허를 내고 전 세계 와인업계를 상대로 사업이 본격화된다.
동아원은 오는 2015년까지 포도 등 고부가가치 농산물 재배 분야에서 17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하고 향후 미국과 유럽 등 와이너리 관리용 장비시장에서 점유율을 10%까지 높인다는 계획이다. 세계 와이너리에서 사용되는 관리시스템은 2013년 1조3500억원, 2019년에는 5조8934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노지재배의 지능화=동아원은 와인 제조의 전 공정을 관리하고 이력을 추적하는 와이너리 솔루션이 등장하게 되면 와인품질이 향상되고 농가소득 향상에 도움을 준다고 밝혔다.
USN 기반의 와이너리 솔루션은 기존의 하우스 재배, 식물농장처럼 인간이 환경을 통제해서 농산물의 생산성과 품질을 높인다는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농작물을 키우는 장소가 기상변화에 민감한 오픈된 환경, 노지재배(露地栽培)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스마트 와이너리가 성공할 경우 야외에서 재배되는 여타 농업 분야에도 파급효과는 클 것으로 기대된다.
첨단 와이너리 솔루션은 와인뿐만 아니라 복분자술과 같은 전통주류나 유제품 등의 고가 가공식품, 인삼 같은 고부가가치 농업 분야에도 적용이 가능해 우리나라의 농업 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전망이다.
정통 와인애호가의 입장에서 스마트 와이너리란 표현은 마치 표준화된 와인공장과 비슷한 이미지로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서나 포도밭의 토양과 기후가 허용하는 고품질의 포도수확이 용이해지면 와인애호가들에게 큰 이득을 준다. 터무니없이 오른 와인가격을 낮춰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와인시장의 대중화가 촉진될 것이다.
로버트 파커가 100점 만점을 준 다나 에스테이트의 2007년 빈티지 와인은 병당 275달러로 매우 비싸다. 그나마 연간 생산량이 2600병에 불과해 미국내에서만 소비되고 국내에는 수입조차 안 된다. 노지재배의 지능화는 와인 외에도 귀한 농작물로 만든 가공식품의 유통가격을 낮추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더불어 세계 와인시장에서 존재감이 없던 변방국인 한국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 효과가 예상된다. 고객이 품질이 뛰어난 와인을 구매하는 조건으로 라벨에 적힌 생산자 표시, 빈티지 외에도 한국산 USN장비로 관리됐다는 인증을 확인한다고 상상해보자. 서구 중심의 와인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영향력과 국가브랜드의 가치는 비약적으로 높아지게 된다.
만화 ‘신의 물방울’의 원작자가 한국 IT와 프랑스 포도밭의 만남을 주제로 환상적인 고급 와인을 소개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 IT가 빚어낸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감아보자.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오를까.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프랑스 소녀?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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