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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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자리에 가장 좋은 안주는 싱싱한 회나 삼겹살이 아니라 즐거운 대화다. 유쾌한 주제는 술자리를 기분 좋게 하지만 얘기를 나눌수록 화가 나게 하는 주제는 술자리를 잡친다. 가령 6·2지방선거 출마자 가운데 윤락행위, 존속협박, 변호사법 위반 등 죄질이 극히 불량한 후보자가 있다는 얘기가 나온면 열이 받아 소주맛이 유난히 쓰다. 자기 부모 연배의 미화원에게 막말을 한 여대생을 생각하면 도대체 세상이 어찌 돌아가나 하고 사발째 들이켜게 된다. 이래저래 대한민국은 술 권하는 사회다.

 최근 모 방송국의 개그 프로그램의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이란 코너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난 4월1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 집권 여당의 한 중진 의원이 이 코너 개그맨의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란 대사가 가장 찝찝한 부분”이라고 지적하면서 촉발됐다. 그러자 진보적 시민단체가 외압이라며 반발했으며 갈등은 증폭됐다. 급기야 담당 PD가 서둘러 진화해 일단락된 분위기다.

 그런데 상황이 좀 이해가 안 된다. 코너 주인공의 설정 자체가 취한 역할이다. 너무 조용하거나 정신이 똑바르면 재미가 없다. 너무 리얼한 게 죄라면 죄다. 힘 없는 서민이 바른말하는 경우는 술의 힘을 빌릴 때다. 술은 용기를 준다. 그뿐만 아니라 술은 ‘나 이상의 나’로 포장할 수 있게 하고 진솔한 나를 보여 주기도 한다. 그래서 술은 서민의 오랜 벗이다.

 통계청과 주류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 2008년 한국의 소주 소비량은 34억5000만병(360㎖ 기준)이다. 우리나라 성인을 3700만명이라고 가정할 때 성인 1명당 93병의 소주를 마셨다는 얘기다. 일년을 놓고 보면 평균 나흘에 한 병꼴로 마신 셈이다. 같은 해 맥주는 44억1000만병(500㎖ 기준)이 소비됐다. 즉 성인 한 명당 연간 119병을 소비했고 사흘에 한 병을 마셨다. 2007년과 비교하면 맥주는 8.6% 증가했고 소주는 6.8% 늘었다. 술 소비가 줄어든 해는 한 번도 없다.

 술자리는 서민들의 사랑방이다. 이곳에선 정치인이나 재벌도 나와 같은 반열이다. 물론 술의 힘을 빌려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술을 예찬했다. 우리 시대 대표적인 주당인 시인 고은은 술도 언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는 “술은 우리를 비약시키고, 착각하게 만들고, 때로 거칠게 만드는 오묘한 언어 같다”고 술회했다. 소설가 김진섭은 그의 글 ‘주찬’에서 “술의 공덕은 실로 지궁지대하여 우리는 이를 슬퍼 마시며, 기뻐 마시며, 분하다 하여 마시며, 봄날이 화창하다 하여 마시며, 여름날이 덥다 하여 마시며, 겨울날이 춥다 하여 마신다. 이것은 결국 술이 우리를 모든 경우에서 건져 주고, 북돋아 주고, 조절하여 주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개그 프로그램을 문제 삼은 의원은 심지어 “어떻게 김 사장이 취임했는데 아직도 그런 대사가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의 지나간 유행어 중에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하지 말자’는 게 있었다. 개그는 개그일 뿐이다. 그냥 웃고 지나면 될 일을 시비걸면 그게 개그다. 경제성장보다 못한 우리 사회의 속좁은 포용력을 생각하니 또 술이 당긴다. 오늘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기분 좋게 한잔할 사람 어디 없나.

 홍승모 전자담당smho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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