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 들여 독자개발 불구 가격 폭락
“먹어도 망하고, 못 먹어도 망한다.” “무대책이 대책이다.”
금융자동화기기(ATM) 국산화에 성공한 LG엔시스와 노틸러스효성 관계자들이 내뱉는 하소연이다. 업계 숙원인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최근 가격폭락으로 열매를 따기도 전에 썩는 것을 걱정해야 할 처지기 때문이다.
ATM업계가 지난 수년간 수백억원을 들여 독자 개발한 국산 ATM이 치열한 가격경쟁 속에 오히려 어두운 그림자로 남았다. 업계의 개발 의욕이 꺾이는 것은 물론이고 산업 기반 자체가 흔들릴 우려에 놓였다.
LG엔시스와 노틸러스효성이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던 ATM 현금입출모듈을 국산화했다고 앞다퉈 발표한 지난해 10월만 해도 2010년은 국내 ATM산업 재도약의 해로 점쳐졌다. 업계는 대일 무역수지 악화의 주범으로 몰리던 설움을 딛고 당당히 하나의 산업으로 대접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해외 수출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올해 ATM 시장의 뚜껑이 열리자 이 같은 꿈은 물거품이 됐다. 시장을 개척하려는 국산 ATM업계와 시장을 수성하려는 외산 ATM업계가 격돌하면서 사상 최악의 저가 출혈경쟁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올해 처음 벌어진 우정사업본부에서 ATM 한 대당 1600만원대 최저가 낙찰가가 나온 데 이어 농협중앙회, 기업은행 입찰에서는 1300만원대까지 급락했다. 불과 보름 만에 낙찰가가 20%나 급락했다.
노틸러스효성은 우정사업본부와 기업은행에 국산 ATM을 처음 공급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수익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처뿐인 영광’에 불과했다.
업계는 올해 국내 ATM시장을 7000여대 규모로 전망했다. 현 시장가격인 대당 1300만원대에 공급할 경우 400억원대 적자를 감수해야 할 것으로 추정했다. 팔아도 밑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말이다. 노틸러스효성과 LG엔시스는 이미 지난해 내수 시장에서는 적자를 기록했다.
LG엔시스는 이 때문에 국산화에 성공하고도 올해 공식 입찰에서 단 한 건의 수주 실적을 못 올린 상황이다. 지난해 공급물량을 바탕으로 농협 지역조합 물량을 소량 확보했을 뿐이다.
사정이 이쯤되자 ATM업계는 벌써 올 사업전략을 수정해야 할 처지에 내몰렸다. 내수 사업전략을 유지하더라도 해외 사업을 통해 수익성을 만회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 중이다.
노틸러스효성은 올해 ATM 해외 매출을 지난해 1500억원에서 1900억원으로, LG엔시스는 100억원에서 300억원으로 늘린다는 목표다. 손현식 노틸러스효성 부사장은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현 가격 수준으로 공급하는 것은) 솔직히 의미가 없다”며 “해외 사업에 기대를 건다”고 말했다.
수요처인 은행권도 고민에 빠졌다. 초기에는 국산화에 힘입어 가격이 낮아지는 것을 반겼으나 최근에는 도가 지나친 가격 하락에 되레 당황하는 분위기다. 자칫 ATM업체가 사업에 손을 떼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짧게 보면 도입 예산을 줄여 좋지만 길게 보면 공존의 의미가 사라질 수 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