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정보를 ‘0과 1’의 조합으로 처리하는 디지털 기술은 일상 속에 엄청난 편리함을 선물했다. 하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디지털화되면서 우리 주변에서는 예상치 못한 위험요소가 점점 커지고 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디지털 기술의 부작용을 합리적 수준에서 제어하는 것은 21세기 지구촌이 풀어야 할 또 하나의 골칫거리가 될 전망이다.
지난 2000년 1월 1일의 Y2K 소동은 디지털 기술의 위험성을 대중이 처음 체험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1999년 12월 31일 자정이 지나는 순간 세계 곳곳에 깔린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오류가 일어나 은행구좌에서 돈이 사라지거나 교도소 감옥문이 저절로 열리고 여객기가 떨어지는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Y2K는 예견된 위험이었기에 수년 전부터 오류 해결을 위한 IT투자가 진행됐고 덕분에 새 천년의 아침은 별다른 소동 없이 밝았다. 비록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전 세계에 깔린 전산망이 한순간 오류를 일으킨다는 악몽의 시나리오는 인터넷 열풍이 한창이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선 꽤 설득력을 지녔다.
그리고 2010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디지털 기술의 확산으로 다양한 위험요소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디지털 위험성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지점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산업화 사회에 내재된 위험성과는 근본적 차이를 가진다. 특히 정보기술(IT)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위험을 내재화했을 뿐만 아니라 구조화했다. 각종 위험이 우리 삶 깊숙이 파고든 것이다. 과거 1970·1980년대 고도성장시대의 휴유증과 달리 21세기 디지털 정보사회는 우리 사회 각 영역에 위험을 미시적으로 구조화했다.
인간이 거부하려고 발버둥쳐도 헤어나지 못하는 거대한 늪이 될 개연성이 높아졌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 아날로그 산업화 시대와 다른 차원의 내재화된 위험이 생겨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산업화 시대에 교통사고를 피하려면 자동차를 타지 않으면 됐다. 하지만 당신이 숨기고 싶은 사생활이 인터넷에 공개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거나 CCTV에 한 번도 노출되지 않고 인근 슈퍼마켓에서 두부를 사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은 이미 적절한 수준에서 리스크를 조절하기 까다로운 ‘디지털 위험사회’로 진입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디지털 족적의 위험성=사회 초년생 이 모씨는 요즘 밤잠을 설친다. 결혼을 앞두고 과거 헤어진 남자친구와 찍은 동영상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까, 일일이 홈페이지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삭제를 요구할까. 인터넷에 한 번 올라간 정보를 없애는 것은 쉽지 않다. 숨기고 싶은 과거도 일단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올라가는 순간 개인의 통제영역을 벗어난다.
네티즌은 대대·연대·사단급의 가공할 만한 힘과 기동성을 보여준다. 게다가 인터넷에서 자신에 관한 글 또는 사진, 동영상을 지우려는 행위는 전혀 생각지 못한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지우려고 했던 글 또는 이미지가 오히려 사회적 관심을 불러 모아 네티즌 또는 파일 공유 프로그램을 통해 일반인에게 널리 유포되는 스트라이샌드 효과(Streisand effect)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누군가와 연애를 할 순 있지만 헤어질 경우를 대비한 디지털 위험관리에도 신경써야 한다.
요즘의 청소년이 성인이 된 후 정치권, 고위관직에 진출할 시기가 되면 기성세대에 비해 개인적 약점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인터넷에 축적된 너무 많은 개인정보가 결국 부메랑이 돼서 돌아오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청소년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SNS에 너무 많은 개인정보를 올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누구나 어릴 때 실수를 저지르지만 훗날 어떤 실수가 다시 부각되어서 앞길을 막을지 모른다는 충고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철없던 시절에 친구를 괴롭히던 동영상 파일 하나 때문에 낙선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불법 음악파일을 내려받거나 호기심에 성인사이트에 접속한 디지털 족적도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향후 지능화된 검색엔진으로 누군가가 평생 저지른 온갖 잘못들을 1∼2초 만에 검색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저작권법 위반으로 입건된 청소년은 지난 2006년 611명, 2007년 2832명, 2008년에는 무려 2만3470명에 달한다.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이 사물 속으로 들어가면서 사람들의 행적을 물건이 기록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CCTV가 아니라도 출입문의 전자센서와 택시의 카드결제기 등은 당신의 동선을 추적하고 있다. 이처럼 불필요하며 잠재적 위험성을 지닌 자료를 제거하는 일은 디지털 위험성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퓨처파일의 저자인 리처드 왓슨은 머지않은 미래에는 사람들의 감시와 관심에서 특정인을 잊게 하거나 찾지 못하게 하는 만드는 신종 직업군이 출현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디지털 위험사회에서 현대인은 마치 어항 속 물고기처럼 되어 간다. 좁아진 세상에서는 각종 디지털 기술의 장점과 함께 사회적 부작용도 냉철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디지털 기술과 현실세계의 불화=디지털 기술이 사이버공간에 머물 때는 그나마 위험수준이 낮지만 현실공간에 물리적 영향력을 미치는 단계로 진화하면 위험성이 매우 커진다.
최근 자동차 업계의 최대 이슈인 도요타 리콜사태의 원인도 디지털 위험성의 잣대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 도요타의 리콜을 부른 원인이 대기업의 오만, 지나친 원가절감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의 구조적 한계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요즘 첨단 자동차는 기계장치를 넘어서 바퀴달린 전자제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상당수 자동차 전문가들은 사고를 일으킨 도요타 차량의 문제점이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있다고 추측한다. 급가속이 멈추지 않거나 브레이크가 제때 듣지 않는 현상은 기계부품의 결함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SW 불량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물론 도요타가 성장 제일주의에 빠져서 품질관리를 못한 실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모든 부품은 가혹한 주행환경에서 버틸 수 있는 물리적 성질을 갖춰야 한다. 기계가 아닌 전자제어부품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예측 불허의 이상작동이 일어날 확률은 높아진다. 가끔 일어나는 자동차 급발진 사고가 ECU가 널리 보급된 시점부터 크게 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예민한 전자제어회로나 반도체칩, SW파일로 자동차를 제어하면 경량화, 원가절감 효과가 크지만 어떤 돌발상황이 벌어질지는 예측불허다.
완성차 업체는 새로운 차량을 출시할 때마다 자신들도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문제점이 내포됐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모른 척할 따름이다. 몇 년이 지나면 도요타는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는 인식이 퍼질지도 모른다. 도요타는 디지털 기술을 자동차 환경에 적용하는데 만족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여타 자동차 회사도 다를 바가 없다.
자동차의 섬세한 디지털 부품이 온갖 도로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완벽하게 확인하려면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든다. 앞으로 순수 전기차가 보급되면 디지털 비중이 더욱 높아진 바퀴 달린 컴퓨터는 운전자를 새롭게 위협할 것이다. 주행하던 자동차의 기능 상실은 가정용 PC가 시스템 오류로 다운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위험수준이다.
디지털 위험사회는 휴대폰, 인터넷, CCTV, RFID칩, 디지털카메라, UCC, GPS 등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고 하루라도 없이는 곤란한 현대인의 필수품들로 형성된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에게 편리한 삶을 제공하지만 반대급부로 사생활 침해와 해킹, 피싱, 대량해고 등 피해까지 안겨주기도 한다.
카메라폰으로 애인과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기는 것은 행복한 경험이지만 헤어진 다음 당신의 은밀한 모습을 전국 이통고객들에게 보여주는 디지털 테러가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인간이 디지털 기술에 감시당하고 중독되어 인간성이 황폐해지는 상황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디지털은 아날로그보다 훨씬 우월한 ‘무오류’ ‘무결점’의 기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배일한·김원석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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