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웬 전사적자원관리(ERP) 프로젝트입니까?”
일부 임원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잔뜩 움츠려야 할 시기에 대규모 IT 투자를 추진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박병옥 정보전략실장(상무)은 “남들이 투자를 안 할 때 투자를 해야 앞으로 경기가 회복될 때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모두가 움츠리는 시기인 만큼 고급 인력 등 좋은 자원을 확보하는 데도 오히려 더 유리하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급기야 ERP 패키지 입찰과 가격 산정이 끝난 후에도 프로젝트의 발이 묶인 채 한 달여간 ‘최종 승인’이 지연되기도 했다. 자동차 업계 불황이 깊어졌던 2008년 겨울, 만도의 글로벌싱글인스턴스(GSI) ERP 시스템 구축은 이렇듯 적지 않은 산고를 거쳐 시작됐다.
◇글로벌 통합경영 결단=만도의 경영진이 최종적으로 ERP 프로젝트를 결정한 배경에는 글로벌 통합경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판단이 있었다.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에 부품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통합경영이 불가피한데, 전 세계 지사와 공장이 서로 다른 프로세스와 시스템으로 운영되다보니 글로벌 정보를 통합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심지어 한 달에 두어 번씩 시스템이 다운되기도 하는 등 10년 동안 업그레이드 한번 안해 노후화된 ERP 시스템으로 인해 결산 작업이 늦어지기 일쑤였다.
2009년 3월 만도는 액센츄어서울사무소, 세윤C&S, 아이스프린트 등 협력사들과 함께 프로세스 혁신 작업에 돌입했다. 오라클 패키지를 기반으로 ERP 시스템을 교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에 맞춰 국내 및 해외 모든 본부의 업무 방식과 제품 기준정보를 모두 표준화하기로 했다. 평택, 원주 등지 각 사업 본부별 책임 경영 방식이 굳어져있던 만도였기에 익숙한 프로세스를 고집하는 본부를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김학재 만도 프로세스혁신팀장은 “일부 특화된 부분을 제외하고 가능한 ERP 시스템의 글로벌 스탠더드 방식을 기준으로 삼아 프로세스 개선을 진행했다”며 “4개월여의 프로세스 혁신 기간 동안 해외 사업장의 개선안도 반영해 전 세계 본부 프로세스를 일원화했다”고 설명했다. 자체개발 시스템 개수가 기존 ERP 시스템에 비교해 약 3분의 1 수준인 1000여개로 줄었다.
7월부터 평택 본사를 비롯해 브레이크사업본부, 원주 스티어링사업본부, 익산 서스펜션사업본부에 이르기까지 국내 사업본부를 대상으로 GSI ERP 시스템을 구축했다. 크게 △기준정보 △영업물류 △생산품질 △생산계획 △구매자재 △경영관리 △재무관리 △IT인프라 등 8개 파트로 나눈 후 파트별 프로세스오너(PO)는 각 부문 현업의 임원이 맡도록 했다. 김 팀장은 “파트별 현업 임원이 직접 변화관리를 책임지도록 한 것이 빠른 시스템 구축과 정상화의 비결”이라고 언급했다. 프로세스 혁신 기간 동안 2주마다 현업의 임원들이 직접 회장 등 경영진 앞에서 추진 과정과 성과를 발표하도록 했다.
실제 ‘현업 PO방식’을 기획했던 박병옥 상무는 “비록 임원들에게 원성은 들었지만 현업의 변화관리가 빨라지는 등 좋은 효과를 발휘했다”고 회고했다. 본사와 사업본부 등에 걸쳐 75개의 재무관리, 55개의 구매재고, 33개의 영업물류, 28개의 생산품질 부문 등 총 219개의 프로세스를 ERP로 구현했다.
◇13만개 기준정보 표준화=ERP 시스템 구축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13만개 부품의 공장·본부별 기준정보를 표준화하는 기준정보관리(MDM) 시스템, 매출·재고 정보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는 경영정보시스템(EIS), 협력사 평가를 위한 공급자관계관리(SRM) 시스템 구축도 함께 진행했다. 실제원가관리시스템, 수입관리시스템 등 패키지에 없는 기능 개발은 자체적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공급망관리(SCM) 역량을 높일 수 있도록 ERP 시스템의 공급망계획(SCP) 모듈을 활용해 생산계획시스템을 추가 개발하고 일일 생산 계획을 전일 오후 1시에 배포하는 등 협력업체와 공유하도록 해 원자재 납품 기간까지 단축시키기도 했다.
박병옥 상무는 “MDM을 통해 품번과 도번 등 모든 정보를 표준화하고 이 정보를 GSI ERP로 집계하면서 전 세계 재고 및 매출이 한번에 파악되도록 했다”며 “또 EIS를 통해 공장별 혹은 전사 정보를 일·월 단위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기존에는 한 부품을 각 공장마다 다르게 명명하다 보니 통합된 재고량을 산출하는 것도 어려웠던 것이다. 품질 정보와 업무 방식까지 표준화해 글로벌 통합 관리가 가능하도록 했다. 재무관리 부문 40개, 생산품질 부문 15개, 생산계획 부문 11개 등 부문별로 제품과 조직, 고객, 협력업체 등에 대해 총 93개의 기준정보를 표준화했다. 또 EIS를 통해 매출, 생산, 채권회전율(AR) 등에 대한 글로벌 통합 데이터를 매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고 손익과 재고 등은 월 단위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시스템 개발 막바지에서는 169개의 주요 업무별 시나리오 테스트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제품을 수출한 후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한 제품의 매출 실적과 미국에서 수입한 제품의 매입 실적을 비교하고 데이터 정합성을 비교해 이 거래처리가 자동으로 정확히 이뤄졌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정확하지 않는 데이터가 있으면 이를 즉시 수정했다.
2009년 10월까지 국내 본부에 적용할 시스템 개발을 진행한 후 11월과 12월은 병행가동 등을 통한 테스트 작업이 이뤄졌다. 가동 일주일 전부터는 기존 ERP와 신규 ERP에서 동시에 업무를 처리하며 면밀한 검증을 거쳤다. 신정연휴 직후 정상가동을 계획했던 덕에 정보전략실 및 ERP 프로젝트 관계자들은 연휴기간 내내 비상대기하며 막바지 테스트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3월말 완료…이후 글로벌 확산=만도는 2010년 3월말까지 안정화 작업을 마친 후 4월부터 미국법인과 중국법인 시스템 개발에 본격 착수할 예정이다. 뒤이어 인도 등지 법인 시스템 개발도 이어진다. 박 상무는 “해외 법인 시스템 구축이 완료되는 내년 7월 이후면 전 세계 각 지사 정보가 통합되는 글로벌 정보 취합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 14일이 걸리던 글로벌 연결 결산 작업은 8일 수준으로 단축됐다. 만도는 3∼4개월 내 시스템 속도를 더욱 개선해 이를 4일 내 완결하는 수준으로 단축한다는 목표다.
만도는 GSI ERP 구축을 통해 글로벌 생산 및 판매 현황 데이터 수집이 빨라지고 정확해짐은 물론 이를 통해 품질, 재고, 생산, 경영관리 등 전 부문에 걸쳐 개선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ERP 구축을 진행하면서 기존 품질관리시스템(QMS)을 걷어내고 ERP내 품질관리(QM) 모듈을 통해 19개의 품질 관리 업무를 표준화했다. 공정불량률 등 5개의 품질 KPI를 재정립해 품질관리를 위한 글로벌 통합 기준정보 체계를 구축하고 품질관리 수준을 높였다. 물류 부문에서도 구매 협업이 강화되고 납품 프로세스도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외주 협력사 벤더중심재고관리(VMI) 적용률을 100% 수준으로 높이고, 납품 업무 수작업을 줄여 시간도 단축시킬 수 있을 전망이다. 또 글로벌 재고 현황이 정확하고 빨리 집계되고, 이동중인 재고들을 포함해 95% 이상의 사외재고를 ERP를 통해 정확히 관리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제품 가공에 소모되는 원가 관리 정확도는 기존 70% 수준에서 90% 수준으로 높아질 전망이다. 주요 공정에만 적용했던 원가 관리를 중요도가 낮은 제품 제조 공정에도 적용해 원가관리 공정 대상을 확대하고 라우팅 정확도를 높이는 한편 원가 정확도를 높일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오는 5월 10년만에 재상장할 예정인 만큼 GSI ERP 프로젝트 완료 이후 분기별 자료 제출을 위한 작업시간이 한결 단축될 수 있을 것으로 회사측은 기대하고 있다.
[인터뷰]박병옥 정보전략실 상무(CIO)
--경기침체기에 대규모 ERP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반대도 많았다. 하지만 지향점이 뚜렷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글로벌 데이터 통합과 빠른 의사결정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경기가 회복된 후에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 구축 완료까지 2∼3년이 소요되는 만큼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고 계속 설득했다.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새로운 IT인프라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영진의 결단이 큰 힘이 됐다. 90년대 말 선구자격으로 ERP를 구축했었지만 업그레이드를 한번도 하지 않아 시스템의 낙후 수준이 심각했다.
--가장 어려웠던 점과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대안은.
▲본부별 프로세스가 크게 상이해 본부 책임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 프로세스 표준화의 장점과 기대효과를 설명하며 가능한 표준 프로세스로의 전환을 설득했다. 정몽원 회장이 직접 ‘가장 우수한 본부의 프로세스로 전사가 통일하면 모두가 상향 업그레이드 되지 않겠냐’며 독려했다.
--조직 관리가 힘을 발휘했다는데.
▲만도는 타회사에 비해 IT 인력과 현업 인력간 순환배치가 잦은 편이었데, 이 점이 ERP 추진에는 도움이 됐다. ERP를 추진하는 IT팀 인력 중 현업 출신이 많고, 현업 출신 중에 IT부서 근무경험자들이 여럿 포진해 있다. 그래서 IT인력도 현업에 대한 이해도가 빠르고, 현업도 이를 잘 뒷받침해 줘 프로젝트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 또 현업 임원이 직접 프로세스오너십(PO)을 쥐고 있다 보니 현업에서 차출돼 온 ERP 추진실 인력들과 현업간 소통에도 도움이 됐다.
--GSI ERP 통한 기대 효과는.
▲ERP로 재고를 통합 관리하게 되면서, 글로벌 재고 정확도가 99.9% 이상으로 높아질 것이다. 또 품질정보도 통합 관리가 가능해지면서 생산계획 정확도도 기존 82% 수준에서 90% 수준까지 향상될 것으로 기대한다. 연결 결산 리드타임은 5일 이내로 단축돼 글로벌 재무 인프라가 강화될 것이다.
--향후 계획은.
▲4월 이후 미국과 중국, 인도 법인 등 해외 법인 확산을 추진한다. 이 작업은 내년 6월까지 완료하고 정식 가동할 계획이다. 이후 GSI ERP의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RP를 확산하면서 해외법인 제품수명주기관리(PLM)도 함께 구축할 계획이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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