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강국으로 향하는 보물지도 같은 역할을 하겠습니다.”
서영주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원장(58)은 새해맞이 덕담으로 보물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릴 적 소풍 보물찾기에서부터 어른이 돼서는 로또까지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품어온 ‘보물’이란 설레는 꿈이 있다.
벽두부터 좀 허망한 꿈을 좇던 기자를 서 원장은 현실에 붙들어 세웠다. 김 원장은 “2010년을 맞으며 KEIT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Treasure Island)’에 나오는 보물지도로 역할을 정했습니다. 온갖 역경과 난관을 겪으면서 보물을 찾아가는 여정이 연구개발(R&D) 과정에서 겪는 실패와 어려움, 고통에 비유된다면, 보물은 바로 산업기술 R&D를 통해 세계 최고의 기술이 만들어져 물질적 풍요는 물론이고 국가 경쟁력까지 높아지는 마지막 결실이 됩니다. KEIT가 그 과정의 나침반이자 지도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보물찾기의 확률과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 R&D의 기획-평가-관리 전 과정에서 새로운 전략과 접근이 필요하다. 지난해 기관 통합으로 만들어진 ‘규모’에 효율과 체계성을 더하겠다는 의지다.
국가 R&D 품질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서 원장은 ‘3하우(How)’를 앞세운다.
우선, 2000년 이후 정부 R&D 지원비는 계속해서 증액돼 왔는데 그 성과는 어떠했는지를 자신 또는 직원들에게 항시 묻는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R&D가 과연 성과가 나오도록 디자인됐는지를 최우선에 놓고 사업을 짠다.
두 번째, R&D 사업을 관리하면서 온정주의로 흐른 것은 없는지 따져 묻는다. 어떤 기준으로 선정됐는지를 면밀히 검증한다. 국민 세금을 연구비로 쓰는 만큼, 투명성은 생명과도 같은 최후의 보루라는 판단에서다.
세 번째, 사업이 디자인되더라도 과학적으로 기획됐는지, 기획 취지에 맞게 선정됐는지 스스로 의문을 갖는다. 이런 의문을 갖고 사업을 챙겨야 추진력도 더해지고, R&D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면서 그가 또 하나 중시하는 것이 바로 R&D의 콘텐츠다. 정부 R&D의 구조나 시스템은 많이 변했다. 하지만 R&D의 콘텐츠는 여전히 시대와 국가의 요구에 뒤처져 있다고 본다.
서 원장은 “한정된 예산으로 하려니, 어떤 내용으로 할 것인지가 굉장히 중요하게 됐다”며 “성숙산업과 IT의 융합, 바이오와 나노 융합 등 융합산업 전반의 R&D 내용을 점검하고, 발전시키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녹색 적자생존’이라는 시대의 코드에 맞는 R&D를 어떻게 뒷받침할 것인지가 연초 서 원장이 마음에 품고 있는 가장 큰 숙제다.
―올해 최우선 사업 목표로 ‘정부 R&D 생산성의 획기적 제고’를 내거셨는데.
▲우선 R&D가 기술 개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사업화)까지 이어지는 R&BD로 본격 진화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국가 R&D 투자는 지속적으로 증가, 논문·특허 등 기술적 성과는 눈에 띄게 높아졌으나, 정작 신산업 창출 등 경제·산업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극히 미흡했습니다. 국가 R&D가 과제만 따내기만 하면 되는 ‘온실 속 화초’가 돼다 보니, 또한 경쟁이 이뤄지지 않고 온정주의 평가로 흐르다 보니 비효율성만 커졌습니다. 산업원천기술개발 과제는 선정 경쟁률이 평균 1.3 대 1에 불과하고 최종평가 시 85% 이상 과제가 성공 판정을 받았습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총 6310건의 단계 평가 대상 과제 중 단 3.8%(238건)만 중단됐으며, 4041건의 최종 평가 대상 가운데 실패 판정을 받은 것은 2.1%(83건)에 불과했습니다. 미국의 DARPA는 최종평가 시 50∼60%만 생존합니다. 연구의 효율성·투명성을 제고하고, 중간 탈락 확대, 미래산업 창출에는 과감한 지원 등으로 개선해 나가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체제에서 절대 앞서갈 수 없습니다.
―그럼, 세부적으로 어떻게 추진하실 계획이십니까.
▲우선 연구의 효율성·투명성 제고를 위해서는 R&D 기획을 강화해야 합니다. 과학적인 기획으로 전략성을 높이고, 경쟁을 촉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R&D 기획 예산을 현행 R&D 사업비의 0.6%에서 2%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겠습니다. 또 R&D 기획단계에서부터 경쟁 도입 및 과제진행 단계별 상시 기획을 실시할 예정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선정 단계에서는 과제 기획을 하고, 수행단계에서는 변화 기획을 짜며, 종료 단계에서는 사업화 기획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두 번째 평가가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상대평가에서의 중간탈락을 확대하고, 혁신적 성과 과제에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R&D 성과제를 부각시키겠습니다. 다만, R&D는 실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패가 영원한 굴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 격려형 R&D로 변화시켜 나갈 방침입니다. 기술분야별 최고의 전문가로 핵심평가위원(리딩 그룹)을 구성·확보해 과제선정부터 종료 시까지 책임평가를 진행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산업 줄기기술을 만드는 대형 국가 프로젝트를 추진해나가겠습니다. 녹색성장, 신성장동력 등 핵심 국정 과제와 R&D 사업 간 연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융합산업 R&D의 구체적 청사진을 말씀해주십시오.
▲IT와 주력산업 간 융합이 구체적으로 활성화되는 전기를 잡아야 할 때입니다. 경제적 파급 효과가 큰 10대 융합산업을 발굴, 육성하고 IT융합의 전 산업 확산을 위한 인프라를 조성해나갈 계획입니다. 산업별로 융합 정도, 기술 수준, 업체 준비도 등을 분석·평가해 맞춤형 전략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바이오와 나노 융합의 본격 산업화로 이 분야 글로벌 기업을 키워내야 합니다. 바이오시밀러, 세포배양 백신 등 바이오제품 개발을 본격화하고, 신약개발 R&D 지원을 위한 바이오스타프로젝트(예산 112억원)로 세계 챔피언급의 ‘바이오스타’ 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총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시장성이 유망하고 상용화 가능성이 높은 나노기술 5대 중점분야를 중심으로 사업화를 추진해 나갈 계획입니다. 나노기술의 융합산업화 촉진을 위한 중장기 나노기술 R&BD 프로젝트인 이른바 ‘나노융합 2.0’도 본격 추진해나갈 예정입니다.
―R&D 성과 관리에 총력을 기울이시고 계신데.
▲전략 분야별로 성과 로드맵을 만들고, 운영함으로써 ‘성과 지향적’ R&D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산업원천 전 분야에 걸친 엔드 프로덕트(end product)/원천기술 성과로드맵을 오는 6월까지 수립해 운영할 방침입니다. 15개 산업기술, 10개 정보통신 25개 전략 분야별 성과 로드맵을 만들고, 그에 준해서 성과관리를 해나가겠습니다. 성과가 나오면 알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기운도 얻고, 다시 뛸 응원도 받게 됩니다. 지식경제 R&D 성과를 놓고 상반기에 대규모 성과 전시회를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이진호기자 jholee@etnews.co.kr
◆부품소재 R&D에 남다른 열정 쏟는다
산업기술평가관리원은 지난해 지식경제부가 마련한 ‘부품소재산업 경쟁력 제고 종합 대책’에 따라 10대 소재와 10대 부품을 기술개발에서부터 사업화까지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실무 추진체로서 역할을 한다. 특히 이 중에서도 10대 핵심소재(WPM:World Premier Material)의 전략적 중요성이 크다. WPM은 한 소재당 세계 시장 규모가 10억달러 이상이고, 우리 점유율이 30% 이상되는 품목이다. 5개만 만들어내더라도 15억달러 이상의 국부가 창출되는 야심찬 계획이다.
산업기술평가관리원은 우리 소재산업의 체질을 근원적으로 개선하고, 경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중장기 대형 소재 개발 프로젝트를 가동한다는 계획이다. 수요 조사를 거쳐 3월까지 10대 소재를 선정하고, 소재별 기업형 사업단을 구성해 기술 개발부터 사업화까지 일괄 추진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전후방 부품소재를 패키지로 개발하기 위한 기업형 R&D 컨소시엄을 구성해 운영하고, 과제당 지원 규모도 15억원에서 30억원으로 100% 증액하기로 했다.
부품소재 R&D에 국제 공동연구,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도 적극 도입, 활용된다. 글로벌 소재 기업 또는 해외 연구기관과 공동 기술 개발을 추진할 계획이다. 기획 단계부터 글로벌 소재기업 또는 해외 연구기관에 공동연구제안서(invited RFP)를 제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국제 공모를 실시할 예정이다. 외국 기업이나 연구소가 국내 기업과 부품소재 분야 공동 연구 과제를 신청하면, 우선 순위 부여하거나 추가 자금도 지원한다.
◆서 원장이 꼽은 올해의 화두는 ‘경쟁’ ‘투명성’ ‘성과’
정부 R&D도 이제 경쟁을 통해 솎아낼 것은 솎아내는 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경쟁을 하게 되면 R&D 결과물의 품질은 자연히 높아지고, R&D시스템도 진화한다. 서 원장은 기금을 활용한 R&D뿐 아니라 산업원천기술 개발사업 전체에 15% 중간 탈락 규정을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해나갈 계획이다.
그가 강조하는 또 하나는 바로 ‘투명성’이다. 정부 지원 연구비의 투명성과 활용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실시간 통합연구비관리시스템(RCMS)’ 구축작업은 상반기 안에 마무리하고, 하반기부터 본격 가동한다는 계획이다. 연구비 유용이 적발되면 항구적으로 국가 R&D사업에 진입을 차단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늘 역설하는 ‘성과’다. 성과로 평가받는 R&D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설명과 함께다.
서영주 원장은 “국가 R&D를 평가관리하는 기관으로서, 성과를 두드러지게 만들고 그 성과를 전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성과는 작게는 연구자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국가와 산업에는 그야말로 보약이 되는 보물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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