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 난세 `IT 진흥` 다스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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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가을. 구본무 LG그룹회장 집무실. 3개월 고민 끝에 통합LG텔레콤 CEO를 맡기로 마음을 굳힌 이상철 부회장은 구본무 회장과 독대했다.

 “LG가 다른 것은 잘 하는데 3콤(텔레콤·데이콤·파워콤) 때문에 힘듭니다.”

 구 회장은 꾸밈없이 ‘3콤이 1등 LG 브랜드에 걸맞지 않다’며 변화를 요구했다. 두 사람은 감추고 포장하고 담아두고 할 필요가 없는 사이다. 이후 LG브랜드 위상에 어울리는 통신기업 창조는 이 부회장의 목표가 됐다. 믿고 맡겨주는 상대의 기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그렇게 LG사람이 됐다.

 이상철 통합LG텔레콤 CEO의 취임 시기는 좋지 않다. 통상 CEO 입장에서 기업 경영권을 인도받는 행운의 타이밍은 실적이 아주 저조할 때 또는 승승장구할 때다. 실적이 나쁠 때 취임하면 오로지 실적에 올인해 좋은 평가를 끌어낼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핑계거리가 있다. 승승장구할 때는 그 나름대로 여세를 몰아 새로운 업적에 도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철 호의 출항시기는 이도저도 아니다.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시장상황이다. ‘S커브’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시점이다. 이런 상태는 실적이 더 나빠지면 그에 대한 혹평을, 또 새로운 뭔가를 만들지 않으면 무능하다는 평을 감내해야 한다.

 ‘꼴찌’라는 자괴감도 크다. 조직 내부에 새로운 사업에 대한 도전정신을 불어넣기조차 힘들다. 글로벌 경쟁도 아닌 국내에서 지는 싸움을 해 본 ‘경험’은 늘 발목을 잡는다. 통신사업에서 고객은 새로운 가치창조의 원천이지만 통합LGT 가입자 기반은 이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무조건 드라이브를 걸어 매출 또는 가입자를 늘리면 되는 것도 아니고, 고객과 주주 그리고 직원과 국민이 모두 인정하는 가치있는 회사를 만들어야 비로소 ‘LG다움’에 근접한다. 다행스러운 것도 있다. LG가 강조하는 ‘창의와 자율’이 이 부회장 코드에 정확히 맞는다는 점이다. 구 회장이 강조하는 ‘변화를 주도하는 테크놀로지 컴퍼니’는 이 부회장의 통합LGT 사업목표와 일치한다.

 사무실에서 만난 이 부회장은 예상과 달리 이 같은 상황을 분명 즐기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바둑처럼 이미 수싸움을 마친 듯하다. 통신 판도 변화는 물론이고 그에 대응하기 위한 기본 전략이 이미 짜여 있었다.

 이 부회장은 통합LGT CEO설이 퍼진 후 기자들의 전화 공세에 시달렸다. 이 부회장은 걸려오는 전화는 꼭 받기로 유명하고, 일면식 한번 없는 기자의 전화도 결코 서둘러 끊는 법이 없다. 그리고 기자와의 통화에서 질문을 받으면 이를 역으로 다시 질문으로 바꿔, 도리어 의견을 물어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를 습득하기를 좋아한다. ‘○기자가 보시기는 어떠신지요?’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이런 식이다.

 이상철만의 독특한 사업구상도 이미 나왔다. ‘탈통신’ ‘가치경영’으로 대변된다. 이미 각 사업부는 탈통신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취임 2주 만에 ‘3콤’이 변하고 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새로운 가치를 찾지 않으면 통신기업은 미래를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움직임이 더욱 빠르다. ‘탈통신’은 통합LGT CEO를 제안받기 전부터 이미 주변에 설파하며 한국 통신의 방향성을 제시해 왔던 것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은 “내가 너무 일찍 이야기해서 그런지 탈통신 개념은 2000년대 중반만 해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며 “그러던 것이 이제 막 시작하는 것이고, 통신의 근본은 같기 때문에 트렌드는 예측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궁극적으로 음성통화는 무료가 될 것이라고 전제했다. “무선이든 유선이든 그 타이밍이 너무 빨리 오면 통신사업 전체가 심각해진다”며 “이제 데이터를 정액제로 갈 것이냐, 종량제로 갈 것이냐와 정액제와 종량제를 합친 누진제 등도 검토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규제라는 것이 너도 이제 컸으니까 풀자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규제를 하는 기본적인 이유는 통신, IT 진흥(정책)으로 국가산업을 키우려는 것인 만큼 이를 염두에 둔 패턴에서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IT강국이 되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통신을 국민 복리증진을 위해 더욱 잘되게 하기 위해 규제를 하는 겁니다. (규제를 하려면) 그런 패턴 속에 3사를 다시 놓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거냐 하는 걸 봐야 됩니다. 좀 컸으니까 무한 경쟁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요. 다시 한번 원천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파수가 최근 통신서비스 업계의 최대 관심사다.

 “우리가 가입자 900만, SKT는 2400만명쯤 됩니다. 통합LGT는 주파수가 상당히 부족합니다. 가입자당 주파수가 우리는 절반밖에 안됩니다. 국민에게 서비스하기 위해서 주파수가 필요합니다. 주파수 문제는 간단합니다. 반납한 사람은 주파수를 다시 못 가져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뻔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정부가 충분히 고려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주파수 분배 대가를 어떻게 정하며 또 할당된 주파수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배분 대가는 시행령으로 정해둔 게 있을 겁니다. 방통위에서 적정 대가는 잡아 놨을 겁니다. IT 산업 발전을 위해서 적정 대가를 재산출해서 남는 돈은 어디에 투자해라 이렇게 한다면 상당히 진취적인 방향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바람이고, 지금 정부도 아마 주파수 대가를 갖고 뭔가 하려는 진흥(정책)의 방향을 잡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파수는 주로 무선데이터 쪽에서 쓰게 될 것입니다. ”

 화제가 된 ‘탈통신’ 프로젝트가 궁금했다. 그의 탈통신은 사실 오래 전부터 구상한 계획이다. 광운대 총장 재임시절이던 지난해 5월, 이 부회장은 KT 동우회 격 모임인 임목회 강연에서 “통신사는 이제 통신망 사업에서 탈피해 통신망을 이용한 새로운 서비스로 나가야 한다. 일상적인 상품에서 벗어나 IT의 새로운 개념으로 나가야 한다”며 KT의 새로운 가치창출 비전 수립을 제안하기도 했다. 당시 이 부회장은 ‘IT와 에너지, 환경, 전력, 미디어, 자동차 등과의 융합화’ 등은 물론이고 ‘고객맞춤형 IT’ ‘IT의 기능화’ ‘콘텐츠·서비스·네트워크·고객의 오픈화 추세’ 등 통합LGT 취임 후에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모든 조언을 쏟아냈다. 이에 덧붙여 ‘KT가 기업, 고객, 홈 부분으로 나뉘어 기업과 개인은 새로운 서비스그룹으로 태어나야 할 것 같다’라는 말도 했다.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타이밍은 한마디로 난세입니다. 탈통신은 빨랫줄(통신망)에 고객 가치를 어떻게 만드느냐, 4500만 고객이 원하는 가치가 모두 다른데 이것을 어떻게 충족시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나는 그 핵심을 짚은 게 애플이라고 봅니다. ‘난 당신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골라 가져라’ 하는 방식입니다. 고객이 자기가치를 스스로 만드니까 누구나 만족하는 것입니다. 탈통신의 기본 마인드는 고객이 스스로 가치를 만들게 두는 것입니다. 애플이 먼저 했지만 그게 탈통신의 기본입니다.

 이 부회장은 그 사례로 PCCW를 들었다. 홍콩의 작은 회사를 왜 언급했을까. 거기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같은 맥락에서 말씀 드리면 IPTV는 물론이고 콘텐츠를 좋게 만들어야 되는데 콘텐츠만 생각하면 이건 기존 TV와 경쟁할 수 없습니다. 케이블은 지상파3사 공짜로 받아서 내보냅니다. ‘게임’이 안 됩니다. 그럼 IPTV는 어디로 가느냐. TV가 아닌 걸로 가야 합니다. 그럼 (그 다음이) 뭐냐. 이제 상상해 보자 이겁니다. 얘기를 하다 보면 자꾸 상대방한테 정보가 나가더라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 CEO인데 정말 브라이트한 친구입니다. 아이디어가 반짝반짝합니다. 그렇다고 그 친구 얘기를 다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도 있고.”

 이상철 부회장은 통신사업자들에게 현재의 시장은 ‘난세’라고 잘라 말했다. 난세에는 영웅이 난다고 했다. 그가 꿈꾸는 영웅은 무엇일까. 통신산업이 S커브에서 밑으로 떨어지고, 군주(국내 통신사 및 단말기제조사 등)의 세력이 약해지고, 애플이나 구글처럼 새로운 세력이 봉기를 하고 있는 지금이다. 군주세력이 굴복하면서 투자할 돈이 외부로 빠져나가게 되고 ‘돈을 벌어 투자하고 다시 돈을 버는 선순환 생태계 구조’가 붕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삼국지에 보면 군주세력이 약해지면 여기저기서 봉기를 하고 우리 군주를 지키자, 나라를 지키자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지금 한국 통신산업이 딱 그런 시점이지요. 이젠 제후 세력들이 나와서 봉기를 제압하고, 나라를 굳건히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봉기 세력을 누를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 ‘탈통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보니까 KT·SKT의 생각도 다 그쪽을 향하고 있는 만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통신 자체가 봉기 세력을 누르고 옛날의 영광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 부회장은 산·관·학·연을 다 거친 전문가 중의 전문가다. 그가 통합LGT 성공을 위해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고 토로했다. “새롭게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 매출이든 기업가치 측면이든 3등 위치를 1등 기업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 하는 압박감, 국가적으로 볼 때 잃어버린 IT 강국을 다시 찾을 수 있겠느냐 하는 압박감이 있습니다. ”

 요즘 이상철 부회장은 통합LG텔레콤의 새로운 사명을 뭘로 할지를 놓고 고민에 빠져있다. 지인들에게도 물어보고 내부 공모도 해보고 있으나 맘에 드는 사명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사명에서 ‘텔레콤’이라는 글자를 빼고도 멋진 이름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어렵게 통합한 3콤인 만큼 한곳에 함께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시너지를 내보자는 취지에서 새로운 사옥도 찾아보고 있다.

 “3년 뒤 통합LG텔레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일단 이름은 달라져있을 테고요. 회사의 이미지는 ‘새로운 통신문화를 만든 회사’ ‘탈통신한 회사’ ‘세계에 다시 한국의 IT를 우뚝 서게 만들어 준 회사’ 그리고 고객입장에서는 ‘새로운 가치를 준 회사’ ‘나의 가장 친한 파트너’ ‘고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회사’ 이렇게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이상철 CEO가 취임 직후 단행한 통합LGT 조직개편 및 인사에 대한 업계의 반응은 ‘이상철 색채’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머지않아 후속 인사가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이 부회장은 “내 기본적인 인사철학은 주어진 인재를 최고로 활용하는 것이지, 저 사람이 잘하고 이 사람은 틀렸다는 식으로 구분하는 방식이 아니다”며 “여기쯤(LGT임원진) 와있는 분들은 대개 역량은 비슷하고 단지 모티베이션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보다 내 책임이 더 크고 무겁다”고 말했다.

 “주유가 적벽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소 생뚱맞은 이 질문에서 이상철 CEO의 인사철학과 그가 그리는 ‘난세 영웅’에 대한 해답이 나왔다.

 “결정적인 하나를 꼽는다면, 신세력과 구대신들의 갈등 소지를 없애 힘을 함쳐 싸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는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심규호기자 khs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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