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정부 산하기관들은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에 따른 내·외부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소처럼 묵묵히 일했다. 올해 ‘백호랑이’의 해를 맞아 기관장들은 거침없는 혁신과 글로벌화에 매진한다는 매서운 각오를 다졌다. 전자신문이 부문별 주요 기관장을 만나 새해 비전을 들어봤다.
“모든 문제는 원칙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민동필 기초기술연구회(이하 기초연) 이사장(63)은 평소 말을 아낀다. 30여년간 대학 교단에서 학생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눴지만 이제는 말 한마디에도 신중을 기한다.
지난해 정부의 출연연 선진화 방안 마련 작업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세종시민관합동위원회 위원 명단에 민 이사장이 포함되면서 그는 항상 이슈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그런 그가 새해 기초연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첫째도 원칙, 둘째도 원칙을 강조한다. 이공계 기 살리기와 같은 해묵은 사회 현안부터 13개 기초 출연연의 통폐합 문제까지 ‘원칙으로 돌아간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으로서 임기도 절반 가량 지났습니다. 복잡한 현안들 때문에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벌써 1년 6개월간 이사장 활동을 했고 딱 그만큼 임기가 남았습니다. 그동안 연구수준의 국제화, 연구과제의 대형 및 융·복합화, 연구기관의 자율화에 역점을 두고 사업을 추진해왔습니다.
지난해에는 연구회와 연구기관이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협력체제를 마련했습니다. 올해부터는 협력체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단계인데 우선 기관별로 그동안 도출한 연구성과가 필요한 곳으로 전달되도록 하는 업무를 중점적으로 추진할 예정입니다.
특히 경인년 ‘백호의 해’가 ‘과학기술을 통해 국가의 자긍심을 높이는 해’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서로 다른 연구 분야와 기술 수준을 갖춘 13개 출연연에 대한 육성과 관리를 담당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초연구를 담당하는 연구기관 내부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달라서 중간자적인 입장의 기초연으로서는 힘든 시간이 많았습니다.
연구회와 연구기관들의 영순위 임무는 국가가 원하는 원천기술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내부 상황을 점검해보니 기초 연구는 풍성히 이루어졌어도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사례가 많았습니다. 외부에서는 국부를 창출할 수 있는 ‘열매’ 자체에만 더 관심이 많다 보니 둘 사이의 괴리가 드러난 것이죠. 이것을 메우는 것이 기초연의 역할입니다.
-이와 관련해 새해 KIST를 필두로 출연연은 물론이고 대학들도 원천기술의 사업화와 기업가 정신 함양을 핵심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성공적인 성과 도출을 위한 기초연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기초연으로서도 원천 기술을 한 단계 격상시켜 사업화하는 것을 새해 역점 사업의 하나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다만 설익은 열매는 먹지 못합니다.
특히 기초연 소속 연구기관마다 수준이 다르고 분야에 따라 사업화하기까지 소요 시간도 모두 다릅니다. 연구가 충실히 수행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주고 실질적인 측면 지원을 하겠습니다.
간혹 국제 전문가들이 “한국의 연구기관은 기초과학 연구와 사업화라는 두 가지 임무를 한 조직 내에서 수행하는데 참 신기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결코 나쁜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승화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비빔밥으로 대변되는 ‘융화’ 문화를 좋아하는데 이것이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지난해 우리나라 출연연 중 처음으로 국제 기준에 따른 출연연 국제진단을 시도해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따른 성과는 어느 정도였다고 보십니까.
▲출연연들이 피부로 느낄 만한 지원을 위해 취임 이후 국가어젠다과제(NAP) 추진과 국제진단을 실시했습니다. 우리나라 출연연 중에서는 최초의 시도였죠.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평가하지만 국제 무대에서는 아직도 우리 대학·연구기관과 성과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맨 처음 국제 기준으로 국제 전문가들이 출연연을 평가한다고 할 때 ‘해외에 우리 현실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막상 평가를 받아본 기관들은 기대 이상의 긍정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연구 수준을 국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장치입니다.
-2010년에는 출연연 통합 발전 방안 마련 등 구체적인 핫이슈가 한층 더 수면 위로 부상할 전망입니다. 기초기술연구회의 핵심 사업 기조는 무엇입니까.
▲대전제는 ‘원칙으로 돌아가자’입니다. 모든 세상일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학에서의 원칙은 과학을 연구하는 연구자가 창의력을 200% 발휘할 수 있도록 지켜봐주고 지원해주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연구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에서 조급하게 성과 도출을 요구하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벌써 최소한 5번은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던 조건이 있었지만 이를 실현시키지 못한 것이 어찌보면 조급한 국민성 때문일 수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과학기술계 출연연 민간위원회’가 발족해 ‘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기관 발전방안’을 마련 중입니다. 사실상 지경부와 교과부가 각각 독자적으로 진행해온 출연연 개편방안을 총체적으로 논의하는 민간기구인 셈인데요.
▲(먼저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인) 산업기술연구회의 경우 단기간에 사업화할 수 있는 기술을 적극 육성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통폐합 접근도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기초연구는 말 그대로 이미 알려진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초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성격이 다릅니다.
기존 연구원들이 보유한 창의성을 너무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전체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창의력은 생각보다 쉽게 망가집니다. 그래서 소통이 필요한 것이죠.
-이공계 기 살리기가 여전히 과학기술계의 해묵은 선결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기초 분야 연구원을 통합 관장하는 기초연으로서 이에 대한 제언을 해주신다면.
▲지난해 12월 말 아부다비에서 날아온 ‘200억원 원전 건설 수주’ 소식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 국민 모두의 노력에 커다란 희망을 안겨줬습니다.
이러한 낭보는 정부의 강한 의지와 꾸준한 투자, 원자력 분야에서 세계 수준의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큰 기여자이자 원자력 발전의 출발점이었던 과학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한 분야가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든든한 기초를 만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숨어있는 노력을 재조명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미래의 더 커다란 성과 창출과 국격 향상을 위한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미래의 두뇌 기반 구축에 큰 손실을 가져다준 이공계 위기 극복에도 적지 않은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
많이 본 뉴스
-
1
내년 '생성형 AI 검색' 시대 열린다…네이버 'AI 브리핑' 포문
-
2
5년 전 업비트서 580억 암호화폐 탈취…경찰 “북한 해킹조직 소행”
-
3
LG이노텍, 고대호 전무 등 임원 6명 인사…“사업 경쟁력 강화”
-
4
LG전자, 대대적 사업본부 재편…B2B 가시성과 확보 '드라이브'
-
5
[정유신의 핀테크 스토리]'비트코인 전략자산' 후속 전개에도 주목할 필요 있어
-
6
모토로라 중저가폰 또 나온다…올해만 4종 출시
-
7
역대급 흡입력 가진 블랙홀 발견됐다... “이론한계보다 40배 빨라”
-
8
국내 SW산업 44조원으로 성장했지만…해외진출 기업은 3%
-
9
현대차, '아이오닉 9' 공개…“美서 80% 이상 판매 목표”
-
10
반도체 장비 매출 1위 두고 ASML vs 어플라이드 격돌
브랜드 뉴스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