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컨버전스-융합형 인간이 뜬다] (4)미국-카네기멜론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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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철강도시였던 피츠버그에선 더 이상 그을음을 찾아볼 수 없다. 시 예산을 들여 건물 외벽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던 철강 먼지를 씻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 곳곳은 파란 화단으로 가득했다. 피츠버그 ‘스틸러스(steelers, 강철)’의 흔적은 미국프로미식축구(NFL)기념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철강 이미지를 씻어내면서 도시의 모든 구조는 대학을 중심으로 개편됐다. 교통편이나 숙소, 그리고 편의시설 등이 대학을 기점으로 형성되면서 ‘친환경 교육 도시’로 변모한 것이다.

 피츠버그는 올해 ‘더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미국에서 첫번째로 살기 좋은 도시’로 꼽혔다. 쇠퇴하던 피츠버그가 거듭난 저력은 교육과 과학기술에서 비롯됐다는게 ‘더 이코노미스트’의 중론이다. 그 뒤에는 카네기멜론대학(Carnegie Mellon University,CMU)이라는 든든한 연구 중심 대학과 연구소가 있다. 학생 혼자 힘으로 산업 하나를 창출해낼 수 있는 이른바 ‘지식융합형 두뇌’를 길러내고 있다.

 ◆카네기멜론대학(Carnegie Mellon University, CMU)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는 1900년 노동자 계층 자녀들을 위해 카네기공업직업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1912년 카네기 공과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67년에 멜론 대학과 통합하면서 지금처럼 카네기멜론대학으로 불리게 됐다.

카네기멜론대학에는 법대와 의대가 없다. 미국에서도 법대나 의대가 없으면 명문대 반열에 오르기가 어렵다. 그러나 1972년 부임한 사이어트 총장의 생각은 달랐다. ‘의대, 법대는 이미 초일류가 즐비하다. 후발 대학으로 이런 분야에 뛰어들어 봐야 2등밖에 안 된다’고 판단했다. 사이어트 총장이 집중투자 대상으로 선정한 학과는 컴퓨터 분야였다. 인지과학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인 80년대 중반부터는 심리학 분야에 매진했다. 미국 대학 순위에서 컴퓨터 분야는 최상위권, 공대, 심리학도 상위권이다. 해킹 등에 관한 세계적 인터넷 보안 관련 민간기구인 CERT는 이런 환경에서 탄생했으며, 인터넷 검색엔진 라이코스도 카네기멜론대학 작품이다.

카네기멜론대학 안에는 화학·수력학·사진학·분자물리학 등 다양한 학과들이 존재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전공별로 뚜렷한 경계없이 학생이 두개 이상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여 직접 만들 수 있는 학제간(interdisciplinary) 학위 과정이다. 컴퓨터 공학(CS) 전공 분야는 카네기멜론대학의 다른 단과 대학과 융합해 금융 공학 등 새로운 전공들이 생겨나고 있는 추세다. ‘학문간 융·복합’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다.

 ◆언어기술연구소(Language Technologies Institute, LTI)

 LTI는 올해 8월 준공한 빌 게이츠 센터 내에 위치해 있다. 게이츠 센터는 20만 평방 피트의 복합건물로, 힐먼 센터(Hillman Center)와 나란히 있다. 복합건물은 250좌석의 강당과 사무실, 연구소, 협업이 가능한 작업 공간 등이 포함됐다. 빌 게이츠는 이 건물 전체 예산 600억원 중 200억원을 기부했다.

 LTI는 라이코스가 탄생한 본고장이다. LTI 센터장인 하이미 카보넬 교수 제자, 마이클 몰딘 교수는 라이코스 검색을 만들었다. LTI는 언어를 최적화된 내용으로 번역해 네티즌들에게 최적의 검색을 보여줄 수 있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연간 200억원을 연구자금을 쓸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는 중이다.

현재 185명의 교수와 학생이 팀을 이뤄 22∼25개 프로젝트를 나누어 맡고 있다. 하이미 카보넬 교수는 “LTI에 필요한 인재는 단연 ‘융합형’ 인간이다”라며 “한 가지만 파고드는 학생은 점점 고도화되는 기술 분야에서 큰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단언한다.

 LTI의 경쟁력은 훌륭한 교수진과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 프로그램에 있다. LTI는 철학, 심리학 등 교수들이 함께 참여하는 세미나가 정기적으로 있어 다양한 분야의 교수들이 자신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 즉, 컴퓨터공학이라고 해서 한 분야만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문과 교류를 중요시한다. 우리나라는 상품 개발만을 생각하는 과제가 많지만 LTI는 사람을 생각하는 연구과제가 대부분이다.

LTI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저스틴 베터리지(30)씨는 “학부 때는 단순하게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언어 분야와 융합된 과학 기술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직관, 상상력, 시각적 패턴 인식 등이 과학적 창조성의 필수요소이기 때문에 과학교육은 예술교육과 융합돼 이뤄져야 하며, LTI는 그런 교육의 새 장을 열고 있다”고 말했다.

 ◆엔터테인먼트테크놀러지센터(Entertainment Technology Center, ETC).

 CMU의 최근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센터 중 하나는 바로 ETC다. ETC를 졸업한 인재들의 대부분이 취업에 성공할 정도로 경쟁력이 높다. ETC는 카네기 멜론대학의 순수예술 대학(College of Fine Arts)과 컴퓨터공대(SCHOOL of Computer Science)가 지난 1998년 공동 설립했다.

ETC는 순수예술에 IT기술을 접목시킨 대표적이고 독보적인 연구 및 인력양성 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과과정은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프로젝트 수행을 통해 인력을 양성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주제도 게임 개발이나 엔터테인먼트 기술개발 등 다양하다.

 한국에서 한국종합예술학교를 마치고 ETC에 입학한 줄리 정(26)씨는 “한 학기 동안 진행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선정해 팀을 만들어 기업 스폰을 받고, 매학기가 끝날 때 그들 앞에서 파이널 공연을 한다”며 “올해는 7명의 학생들과 12월에 뉴욕에서 한 학기 동안 만든 프로그램을 전시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나는 디자이너지만 프로그래머의 일도 알아야 하고 프로듀서도 맡는 등 자기 분야만 고집하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며 “공부나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창의적인 실무 교육을 받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ETC에서 학생들이 수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기업에서 수주하거나 기업이 요청한 프로젝트가 대부분이다. 픽사나 월트디즈니, 루카스필름 등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연구소를 들러 연구팀을 스폰하고 인재들을 독려한다.

 ETC에서 몇 명 안되는 한국 학생인 이종호(32)씨가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대어급이다.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미국의 한 군수업체가 돈을 대서 개발하고 있는 ‘디지털비디오 라이브러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축척해 놓은 영상을 활용해 자료를 분석하고 부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씨는 “연구소나 회사에서 상황을 던져주는 프로젝트가 가동되면 각기 다른 분야 전문가와 팀을 꾸려 일을 완수해야하는 시스템”이라며 “4명의 학생과 함께하고 있는데 우리는 서로의 분야에 대해 깊은 이해가 필수라 학기가 끝나면 우리는 전 분야의 프로가 된다”고 설명했다.

 ETC에 대한 기업의 만족도는 기대 이상이다. 현장에 곧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을 배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급인력이라도 재교육 과정을 거쳐야 하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다르다.

카네기멜론대학은 ETC의 성공모델을 바탕으로 글로벌화를 꿈꾸고 있다. 전 세계에 ETC를 두고 현지에 맞는 교육 및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돈 마리넬리 ETC센터장은 “뛰어난 IT인프라를 갖고 있는 한국은 ETC를 설립하기에 매력적인 곳”이라며 “지난 해 상암동 DMC센터에 설립을 추진하고 계약까지 완료했지만 막판 정치적인 이슈로 좌절됐었는데 재진입을 시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뷰-돈 마리넬리 ETC 센터장

 “우리 연구소 슬로건이 바로 ‘좌측 뇌와 우측 뇌 모두를 위한 프로그램(A graduate program for the left and right brain)’입니다. 융합형 인재 양성은 시대의 흐름입니다.”

 돈 마리넬리 ETC 센터장은 학생의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이라며 창의성을 갖고 미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융합형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데 공감했다. 마리넬리 센터장은 “과거의 공학교육이 테크니컬 스킬만을 강조해왔다면, 앞으로의 공학교육은 테크니컬 스킬은 물론이고 하이터치, 즉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같은 인문학에서 경제·경영·커뮤니케이션과 같은 프로페셔널 스킬을 갖추도록 이뤄져야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ETC의 경쟁력을 프로젝트 중심의 현장 밀착형 교육에 있다고 봤다. 그간 학생들은 좋은 기술을 개발하도록 교육을 받았지, 개발된 기술을 소비자에게 팔릴 수 있도록 어떻게 사업화하고 관리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팔릴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는 지적이다. ETC는 이와 상반되는 산학연계 프로젝트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마리넬리 센터장은 한국에 대한 애정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한국처럼 IT기반이 잘 닦여진 나라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더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며 “국가에서 ETC와 같은 센터를 많이 만들어 인재를 양성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피츠버그(미국)=허정윤기자 jyhur@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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