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에서 처음 지핀 ‘입학사정관제’가 들불처럼 번졌다. 올해 국·공립 15개, 사립 44개 등 총 59개 대학에서 시행한다. 이 대학들은 시험성적으로는 판별할 수 없는 수험생의 잠재력과 성장성, 창조성 등을 직접 발굴하자는 취지로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선발 기준의 공정성과 객관성 등을 확보해야 하는 어려움도 없지 않다. 입시에 관한한 우리나라 학부모의 관심이 워낙 뜨거워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비난의 집중포화를 맞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공계 수험생을 둔 학부모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KAIST가 전주기전여고에서 3시간가량 진행한 입학사정관의 학생 면접 현장을 동행 취재했다.
대전 KAIST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전주기전여고. 지난주 입학사정관인 이인호 석좌교수와 오영석 교수가 이 학교의 KAIST 입학 지원자들과 마주 앉았다. 이 석좌교수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러시아 대사를 지냈으며, 오 교수는 ‘학생 총기만 보면 웬만큼 다 읽는다’는 입학 베테랑이다. 오 교수는 지난 1개월간 혼자서 58명이나 방문 면접을 실시했다.
두 교수에게 주어진 정보는 6쪽짜리 입학 원서가 전부다. △지원 학생의 담임교사가 작성한 학생 관련 내용 △수험생이 작성한 지원동기 KAIST 선택 이유 △과학기술 인재로의 성장 가능성 및 영재성 △특별활동 한 가지와 사회적 영향력 △어려움 극복 사례 등 다섯 개 항목이 300∼450자 안팎에 담겼다.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지금부터 두 입학사정관은 대화를 통해 학생의 잠재력과 성장 가능성 등을 파악해야 한다.
사실 수험생 면접은 학교장 접견 때부터 시작됐다. 20여 분간 주로 학교 소개가 이루어지지만 사정관 머리 속엔 이미 면접 대상 학교의 학습 풍토와 교육 철학 등이 들어온다. 이어 담임 교사와 30여 분 얘기를 나눠 수험생이 어떻게 학교생활을 해 왔고 잘하는 점과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대략 파악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학생 면접이 시작됐다.
오영석 전문사정관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때가 있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학생의 긴장감을 풀어 줬다. 많은 학생들이 긴장해 제대로 말을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것으로 보이자 오 교수 입에서 느닷없이 “김수현 학생(가명), 자네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튀어 나왔다. 김수현 학생이 당황하며 머뭇거리다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무난한 소개였지만 오 교수가 원했던 대답은 아닌듯 싶었다. 곧바로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18년 인생이 길었다고 생각하나. 그동안 일어난 일 두세 가지만 말해 보라. 그 일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설명해 달라.” 김수현 학생은 대답을 하다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눈물도 글썽였다. 힘들었던 시절 생각 때문이라고 했다.
오 사정관은 면접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외로움을 엄청나게 느끼는 것 같다. 면접 과정에서 우는 아이들을 많이 봤다. 부모와 친구, 교사와의 담이 높은 것 같다. 심지어 속내를 털어 놓으니 후련하다는 학생도 있었다.”
상식과 철학을 한꺼번에 묻는 질문도 나왔다.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됐으며 그 기간에 인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세 가지 일을 설명하라는 식이다. 언제나 그렇듯 답변에 대한 질문이 꼬리를 문다.
면접 과정을 차분히 지켜보던 이인호 석좌교수가 나서 김수현 학생을 더욱 당혹스럽게 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세 가지 일을 외국어로 이야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면접이 마무리되자 이인호 석좌교수는 40년 전 자신이 유학하려고 미 정부와 6개월간 편지를 주고 받으며 면접하던 이야기를 꺼내며 “연필 굴리기식의 성적 평가가 고쳐지지 않는 상황에서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다보니 보조 개념이었던 면접이 마치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라는 말로 깊이가 없는 시험 출제 방식을 꼬집었다.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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