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반에 걸쳐 ‘융합’ 물결이 거세다. 산업 간 융합을 통한 새로운 융합산업이 등장하는가 하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융합’이 새로운 블루오션을 열어줄 핵심 성장동력이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IPTV가 대표적인 사례다. IPTV는 방송과 통신으로 갈라졌던 콘텐츠 유통 채널의 벽을 허물고 상호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에 세상은 방송과 통신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새로운 융합 콘텐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IPTV 사업자는 물론이고 인터넷 기업들이 방통융합 시대에 맞는 융합 콘텐츠 확보에 앞다퉈 나서고 있는 이유다.
우리 정부도 이 같은 ‘융합’ 트렌드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융합’을 통해 새로운 성장산업을 창출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특히 문화콘텐츠 부문에서는 차세대 융합 콘텐츠를 집중 육성하고, 게임 가운데는 기능성게임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발표가 나오기도 했다.
기능성게임이 바로 ‘융합’이라는 사회적·문화적 추세와 요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융합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신성장동력의 핵심은 ‘융합’=정부는 지난달 22일 대통령 앞에서 진행한 ‘신성장동력 보고대회’에서 6대 분야 22개 신성장동력을 제시했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융합’ 이야기가 나온다.
6대 분야에 포함된 융합 신산업은 아예 명칭에도 ‘융합’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나노기술을 정보·에너지·환경·바이오 등 다른 산업에 접목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자동차·조선·건설·섬유·국방·항공·의료·교육 등 전통산업과 IT산업 간 융합을 추진하겠다는 것이 주요 과제다.
특히 문화콘텐츠 부문에서는 차세대 융합 콘텐츠 육성에 향후 5년간 6500억원을 투입하겠다는 구체적인 중장기 계획도 마련했다. 또 제2의 온라인게임 혁명을 위해서는 기능성게임을 중점 육성하겠다는 발표도 있었다. 정부차원의 문화콘텐츠 산업 육성정책이 ‘융합’에 초점을 맞춰 진행될 것임을 충분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유인촌 장관도 지난 8일 “디지털기기의 발전으로 산업 간 융·복합이 촉진되고 있고, 다양한 형태의 융합형 콘텐츠가 등장하고 있다”며 “이는 우리가 앞선 IT 및 방통융합기술 등을 활용해 세계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게임’은 세계가 주목하는 융합의 매개체=산업 간 또는 사회 각 분야 간에 융합을 이끌어내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 기술을 선박이나 의료분야에 접목해 활용할 수도 있고, 항공산업과 의료산업을 연계해 항공의료 산업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단순한 산업 간의 결합만으로는 큰 시너지 효과를 내기 어렵다. 뭔가 상승작용을 이끌어낼 요소가 필요하다. 융합을 이용해 뭔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만 새로운 성장산업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다.
‘게임’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게임은 매우 강한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 다양한 최첨단 IT의 종합체인데다 ‘흥미’라는 기능적 요소를 통해 강한 몰입성을 보여준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견이 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이라고 했다. 가상세계지만 직접 몸으로 체험하도록 해 주는 것만큼 훌륭한 매개체는 없다.
◇기능성게임은 융합 콘텐츠의 총아=이 같은 게임의 특성은 어떤 산업과 연계해도 곧바로 충분한 시너지 효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수원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교과서를 온라인게임에 접목한 수업을 진행했다. 2주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영어교과서의 지문을 온라인게임의 퀘스트로 넣음으로써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스스로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교육과 게임의 만남이 가져다준 효과다.
교육에 참여한 교사들도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몰입하는 것을 보고 자기 주도적인 새로운 교육방향과 합치되는 것 같아 좋았다”며 “여건만 마련된다면 적극 활용하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같은 게임의 기능을 병원에서 활용하면 재미있는 재활 프로그램이 탄생하게 된다. 평소에는 마음껏 해 볼 수 없는 희귀질환에 대한 수술시험도 원하는 때 원하는 만큼 해볼 수도 있다.
국방 분야에 연결하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가상의 세계에서 체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다양한 밀리터리 시뮬레이션이 되고, 기업에 적용하면 경영시뮬레이션이 된다. 환경이나 관광·종교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육·건강·의료·보건·직무훈련·감성이나 지능개발·마케팅·위기관리·환경문제 등 우리의 삶과 관련한 모든 주제는 게임을 형태로 재구성이 가능하다. 이는 기존 게임산업의 외연을 확장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가치를 지닌 산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기능성게임이다.
김순기기자 soonkkim@
◆위정현 중앙대 교수 기고
며칠 전 가깝게 지내는 한 교수가 진지하게 물어왔다. “시리어스 게임(serious game)이란 도박이나 폭력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가진 게임을 말하는 건가요?”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참고 설명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말하는 시리어스 게임은 한국어로는 기능성게임으로 번역되며, 이는 교육·산업 등의 목적을 위해 활용되는 게임을 지칭한다고.
그 교수는 계면쩍게 웃고 말았다. 사실 이 교수의 질문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기능성게임이나 활용에 대한 한국의 전반적 인식이 아직 그 정도 수준일 뿐이다.
기능성게임의 가장 큰 중요성은 엄청난 산업적 잠재력이다. 대기업 경영자가 온라인게임 산업을 ‘애들 푼돈 따먹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100원짜리 게임 아이템을 보면 이런 비유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만일 게임 하나가 100억원이라면 이야기는 다르지 않을까. 유럽 에어버스 자회사가 개발한 공항 지상요원 훈련 프로그램은 개당 1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또 비행기 조종사 훈련을 위한 미국의 항공기 시뮬레이터 회사는 72시간 훈련비용으로 6만달러를 요구한다. 이쯤 되면 기능성게임은 전통 있는 중후장대 산업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
기능성게임은 장차 교육과 훈련의 거의 모든 도구를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1조원 규모에 달하는 한국의 운전면허 시장을 필두로 의료·국방·외국어 학습 등이 기능성게임으로 대체되면 현재의 국내 게임시장 규모인 4조원의 10배 이상으로 늘리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 등지와 달리 기능성게임의 주체 형성이 늦어지고 있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기능성게임은 전통산업과 게임을 잇는 중요한 가교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엔터테인먼트 게임회사가 아니라 IBM이나 인텔·보잉사·GE 등이 시장에 진입하고 있지만 한국의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은 무관심하다.
기능성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개발자의 상상력을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 게임 개발자는 이런 ‘리얼게임’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결국 기능성게임은 엔터테인먼트용 게임과는 다른 산업적 주체가 형성돼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은 한국이 엔터테인먼트 목적의 게임, 특히 온라인게임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기능성게임 분야에서는 개발도상국 수준이라는 점이다.
해외의 콘퍼런스에서 한국의 온라인게임에 대해 강연하면 모두들 주의 깊게 듣지만 한국의 기능성게임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기능성게임은 여명기에 불과하다. 정부와 기업의 전략이 중요한 시기다.
jhwi@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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