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50년, 새로운 50년](24) `전자산업=수출효자` 일등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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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2월에는 우리나라 전자산업 발전사의 한 축을 담당한 한국전자공업진흥회가 출범했다. 진흥회는 △전자산업 진흥을 위한 업계의 의견 수렴 △대정부 건의 △산업 및 기술정보의 제공과 국제협력 △기술개발과 수출지원 △표준화 등 공동 사업 △전시회를 통한 홍보 등을 목적으로 상공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 설립된 특별법인으로, 설립 이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의 전자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다. 현재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산업 경쟁력을 갖추는 데 일등공신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진흥회는 지난 6월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로 이름을 바꾸고, 전자·정보통신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출범 배경=한국전자공업진흥회 출범 배경은 1967년 당시 컬럼비아대학 교수였던 김완희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출했던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 보고서에서 김 박사는 초창기 전자산업의 효율적인 육성을 위해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이 필요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료되는 1971년까지 이를 전담할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논의가 무산됐고, 기존 연구소 등이 진흥업무를 나눠 맡는 형태로 정리됐다.

 이후 1975년 청와대가 주최한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진흥회 설립 문제가 다시 논의됐다. 당시 장예준 상공부 장관은 대통령이 주재한 이날 회의에서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과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 한국정밀기기센터의 전자공업진흥업무를 통합한 강력한 민간 단체의 설립계획을 보고했다. 앞서 전자업계에서도 업무 중복 등의 논란이 있던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과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의 통합을 상공부에 건의한 바 있다.

 ◇설립 급물살=당시 정부는 전자산업 분야의 새로운 수출진흥 아이디어 발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민간단체들을 통합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안으로 진흥회 설립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이후 설립 논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장 장관의 보고가 있은 지 4개월이 지난 1976년 2월,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은 정기총회를 열고 조합의 발전적인 해산과 새로운 사단법인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의 발족을 결의했다. 이날 다른 장소에서는 수출조합의 해산결의 직후 한국전자공업진흥회의 창립총회가 열렸다. 창립총회에는 협동조합 이사장이던 박승찬 금성사 사장을 비롯해 강진구 삼성전자 사장, 설원량 대한전선 사장, 이우룡 한국마벨 사장 등 당시 한국 전자·통신업계의 대표격인 기업경영자들이 거의 참석했다. 초대 회장에는 박승찬 사장이 선임됐고, 업계 주요기업이 모두 참여하는 임원진도 구성했다.

 이후 진흥회는 민법 규정에 의한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아 1976년 4월 20일 정식 출범했다.

 ◇김완희 상근회장=진흥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 주장했던 김완희 박사는 1978년 12월 상근회장에 추대됐다. 이후 김 박사는 진흥회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김 박사는 여러 민간 조직들을 흡수, 통합해 진흥회를 정책부처(상공부)와 민간기업을 연결하는 민간단체로서의 역할을 본격화한다. 회원 수도 240개사 이상으로 늘어났고, 유관기관에서 업무를 이관받아 업무영역도 크게 확대됐다. 진흥회는 1979년 3월 한국정밀기기센터 전자사업부를 흡수, 통합하며 한국전자전(KES) 등 진흥업무를 가져왔으며, 1980년 11월에는 한국전기용품제조협회에서 전기용품에 관한 수입 추천업무 등을 이관받으면서 전자산업진흥기능을 통합한 명실상부한 기관이 됐다.

 운영 과정 등에서 관료주의 등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진흥회는 1980년대 초반 전자산업을 수출 1위 품목으로 부상시키고 1987년에는 전자부문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권건호기자 wingh1@

◆김완희 박사 인터뷰

 전자공업진흥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전자업계 대부’로 불리던 김완희 박사(82)다.

 김 박사는 얼추 40년 전 이야기지만 그때를 누구보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김 박사는 이미 여든을 넘긴 ‘은퇴 세대’지만 지금도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ITU에서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여전히 정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진흥회 설립 건은 대통령 지시로 1968년 보고한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보고서’에서 이미 제안한 내용이었어. 필요성은 누구나 느꼈지만 마땅히 진흥회를 맡을 인물이 없어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아마 70년대 중반에 출범했지. 출범 후 한 2년 됐을까. 결국 내가 총대를 매기로 했어.”

 김완희 박사는 전자공업의 기틀을 닦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지만 정식 회장을 맡기 전까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는 실세 측근이었다. 10년 넘게 대통령과 130통에 이르는 서신 왕래와 개인 면담을 통해 전자 공업에 관한 정책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앞에 나서는 건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을 때였고 학문적으로도 큰 성과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 한국에 ‘올인’하기는 다소 부담스러웠지. 시간을 끌면서 계속 고사하다가 국내 전자 공업에 일조하고 더욱이 대통령의 의중이라고 생각해 결국 수락했지.”

 그래서 김 박사는 78년 5월 진흥회 초대 상근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진흥회는 박승찬 금성사 사장이 비상근회장이었다. (김 박사는 회고록에서, 내가 진흥회 회장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박 대통령이 “김 박사가 진흥회 회장이 돼 거기에서 무슨 일을 하지”라고 물었다는 얘기를 비서관에게 듣고 당황했다. 취소할 수 없었다. 소신대로 전자공업을 육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다.)

 김 박사는 제일 먼저 진흥회 구조 개선에 앞장섰다. 상공부가 일일이 간섭하는 업무 방식으로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사회를 10명에서 30명으로 늘리고 각종 분과위원회를 신설해 가능한 많은 업체를 위원으로 임명했다.

 “진흥회의 목표는 세 가지였어. 첫째 전자 공업의 국내 시장 확대, 둘째 수출 신장, 마지막으로 선진 기술 도입이었지.” 김 박사는 첫째 과제를 위해 35%나 되는 특별 소비세가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청와대, 총리실 등을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특별 소비세를 15%로 인하했다. 한국을 알리는 데도 힘을 쏟았다. “시장을 열기 위해 전 세계를 내 집 뒷마당처럼 뛰어다녔어. 시간을 아끼느라 런던에서 아침을 먹으며 회의를 하고 바로 뉴욕으로 날아와서 오후 모임에 참가하는 일도 다반사였어.” 그렇게 해서 국내 전자 제품은 수출의 물꼬를 텄다.

 김 박사가 당시 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일할 수 있었던 데는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척박한 국내 전자산업에 도움을 주겠다는 일념도 컸지만 박 대통령 인품에 감동했지. 박 대통령의 강한 의지, 소탈한 자세, 진지한 언동에서 희망을 본 거지.”

 김 박사는 박 대통령 서거 후 81년 진흥회장에서 물러났지만 지금까지도 국내외에서 전자 입국 초기에 한국 전자 산업을 키우고 세계에 알리는 데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남아 있다.

강병준기자 bj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