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CEO]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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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 얘기를 하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빠져든다. 서글서글한 표정과 미소, 겸손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신뢰 자체기도 하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사장(50)은 우리나라 반도체장비 1세대를 대표하는 엔지니어 출신 CEO다. 외국계 반도체기업의 기술지원 엔지니어로 장비 분야와 처음 인연을 맺은 황 사장은 주성을 세계 유수의 장비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표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최근 진출한 태양광 장비 사업으로 한 해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는 황철주 사장을 어렵사리 만났다.

 ◇친구 그리고 대학진학=오늘날 주성, 그리고 황철주 사장이 있기까지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사실 어렸을 적 황 사장의 집안은 그리 넉넉한 편이 못 됐다. 형제들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없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 방앗간 하는 사람이 전부였다. 홀로 상경해 누님 댁에 신세지면서 동양공고에 다녔다.

 “전 공고 나왔거든요.” 황 사장은 학창시절 이야기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형편이 어려워 대학은 꿈도 못 꿔본 황 사장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를 마치면서 학교의 배려로 울산에 있는 동양나일론에 입사했다. 당시 대기업도 부러워하는 아주 좋은 직장이었다. 겨울방학이 되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화가 많이 없던 시절이라 편지가 왔다. ‘공고생 대상으로 대학 진학하는 학생에게 처음 특혜를 주기로 했으니 서울 올라와서 대학을 가라’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끈질긴 설득에 회사를 포기하고 학교와 상의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공고의 최대 목표는 취업이었다. 그나마 학교에서 가장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해서 보냈는데 그만둔다고 하면 후배들이 그 회사에 들어가는 데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대학 원서를 써주지 않는 바람에 4년제 대학에 가지 못하고 인하전문대에 들어갔다.

 전문대를 졸업할 무렵에는 OPC라는 방위산업체에 들어갔다. 군대를 안 가는 조건인 탓에 월급은 당시 군인 장교월급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자취방을 얻을 돈도 없었다. 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편입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편입한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 결심한 것이다. 친구들이 책도 사다주고 돈도 걷어주고 해서 편입 시험 3개월을 남겨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여기저기 넣었지만 다 떨어지고 인하대에 붙었다. 어머님 회갑 때 들어온 금붙이를 몽땅 팔아 마련한 입학금을 집어넣고 군에 입대했다. 복학 후 한 학기 다녔는데 장학금을 못 탔다. 장학금 없이 학교 다닐 형편이 안 되던 그였다. 아남산업에 들어가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이때 공무원이었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남산업을 1년 6개월가량 다니다가 대학 졸업 직전에 현대전자를 거쳐 반도체 장비업체인 ASM에서 자리 잡았다. 황 사장은 “정신적으로 성장한 것은 고등학교 친구들 덕분이었다”고 되뇌었다.

 ◇주성의 탄생, 승승장구=처음엔 ASM의 국내 에이전트에 들어갔다가 새로 만들어진 한국지사로 옮겼다. 7년 후 ASM은 지사를 철수했다. 황 사장은 다른 직장을 구할까 하다 직접 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1993년 서울 석촌호수 근처에서 오퍼상을 하던 대학친구 사무실을 같이 얻어 일을 시작했다. 주성이라는 이름의 개인회사를 차려 혼자 반도체장비를 업그레이드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2년 정도 이 일을 하다가 다른 회사와 협력해 체임버 하나를 만들어 공급했다. 풀 장비는 아니었지만 주성이 만들어지고 공급한 첫 작품이었다. 1995년 말이다. 이후 미국 지너스와 함께 기술협력을 통해 장비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외부 자금지원과 개인 투자가의 투자도 받아 주성을 법인으로 전환했다.

 지너스의 이름으로 삼성과 거래를 시작했다. 나중엔 삼성에서 직접 지원도 해주고 직접 수주도 해줘 회사가 급성장했다. 1999년 상장까지 이어졌다. 당시에 초기 CVD장비인 HSG장비가 나오기 시작해 삼성의 90% 수준의 점유율을 기록했고 현대전자와 LG반도체에는 100% 공급했다. 국내 장비업체로서 양산라인에 들어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해 12월 주성은 코스닥에 상장하며 업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시련, 그것은 준비의 시간=급성장하자 견제세력도 등장했다. 한국에서 누구도 반도체 양산 장비를 만들지 못할 것으로 여겼던 미국과 일본의 장비업체들이다. 더욱이 IMF 외환위기 이후 경기가 나빠졌다. 현대와 LG반도체가 합병되자 기댈 곳은 삼성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삼성과의 거래도 중단됐다. 내수시장에 집중한 탓에 해외 공략 기반도 없었다.

 세상 일이 다 그렇다. 좋을 때는 다 좋다가 나빠지면 한없이 나빠진다. 그러나 황 사장은 오히려 그때를 제2의 행운기로 본다. 그때 면역성을 기를 수 있었고 세상을 올바로 보는 좋은 기회가 됐다는 설명이다.

 “저항력이나 시스템적으로 구축하지 못하고 주문은 많이 들어오고 그러면 고객 대응 능력이나 조직 관리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규모만 커지는데 기업이 가장 위험한 때는 바로 그런 때라고 봅니다.” 당시의 어려운 시기가 없었고 주성이 더 커졌으면 스스로 붕괴됐을지도 모른다며 오히려 다행이라는 해석이다.

 ◇태극기를 걸자=황 사장은 당시 3년간 많은 것을 배웠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아쉬움도 경험했다. 애써 키워온 주성이라는 조직이 무너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우리는 창업할 때부터 세계 1등 회사하고만 싸웠습니다. 솔직히 세계 1등하려고 시작했고 덕분에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주성이라는 회사의 가능성을 보고 정부나 대기업, 대학교수 등 주위의 모든 사회가 지원하고 기대도 많이 했는데 하루아침에 무너지려 하니 안타까워 어쩔 수 없었다.

 외국 회사에 주성을 넘길 생각도 했다. ‘나 하나 빠지면 주성이 잘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에 미국·일본·유럽 회사를 만났다. 반응은 싸늘했다. 아니 싸늘하기보다는 황당했다. 당시 자금이 1000억원 정도 있었고 개인 지분이 30% 가까이 됐는데 접촉했던 모든 업체들이 공짜로 지분을 주면 거둬들이겠다는 반응이었다. 억울하고 울분이 터져 ‘그럴 바엔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하고 돌아왔다. 직원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놓고 “다시 시작하자”고 결의하고 대형 태극기를 걸었다. 주성의 명물인 대형 태극기가 이때 등장했다.

 ◇연구개발에 대한 집념=연구개발(R&D)을 향한 그의 노력은 남다르다. R&D에 대한 집념이 없었다면 지금의 주성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HSG장비에 이어 금속 유기물 화학 기상 증착장비(MOCVD)를 개발했다. 2000년 말부터 LCD 장비 개발에 착수했다. 대형 거래처가 끊겨 고전하긴 했지만 LG와 다시 시작해 4.5세대 데모장비부터 5세대, 6세대, 8세대 제품까지 공급했다. LCD장비가 회생의 주춧돌이 됐고 2001년부터 개발하기 시작한 원자층 증착장비(ALD) 시장이 2005년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최근엔 태양광 장비 시장에도 뛰어들어 올 초 한국철강에 공급을 완료했다. 지금은 국내보다 해외 시장에서 더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사람, 사람, 사람=“갈수록 느끼는 것은 사람의 귀중함입니다. 저는 매사를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하고, 사람을 위해 생각하며, 사람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합니다. 모두 다 사람이 중심입니다.”

 황 사장은 “주성의 재산은 기술력이 아니라 근무하는 사람”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사재를 털어 일운과학기술재단을 운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재단을 통해 지금까지 30여명에게 6억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인하대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던 2005년만 해도 이런 생각을 못 했다. 기술을 최고로 쳤다. 경영이나 회사 운영보다 세계 최고의 기술만 있으면 성공하고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 와서 보니 기술은 일부더군요. 기업이 성공하는 데 최고의 기술력은 기본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의 신뢰성이나 기업의 문화, 인프라입니다.”

 최근 주성 공장 벽에 붙은 태극기 옆에 ‘행복을 만드는 회사’라는 대형 현수막이 하나 더 붙었다.

◆황철주사장은

 1959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다. 동양공고와 인하전문대, 인하대 전자공학과를 나왔다. 대학시절 아남산업 등에서 현장경험을 했고 현대전자를 거쳐 ASM에서 반도체 장비분야와 인연을 맺었다. 1993년에 주성엔지니어링을 창업했다. 반도체 장비업체로 시작해 LCD장비로 사업영역을 확대했고 최근엔 태양광 장비 분야까지 진출했다. 평소에 강조하는 것은 신뢰와 사람(인재)이다. 1998년에 벤처기업상 과학기술부장관 표창을 시작으로 반도체장비 국산화에 기여한 공로로 산업자원부 장관상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 특허기술대상 충무공상과 벤처기업대상 은탑산업훈장, 반도체 기술대상 세계으뜸기술상(대통령상), 대한민국 신기술상을 수상했다. 지난해엔 수출 1억불탑을 받았다.

주문정기자 mj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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