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병술년 패전의 복기

 병술년 세밑 풍경이 스산하다. IMF 환란 이후 최대의 불황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해마다 반복되는 흥청거림도 많이 사라졌다. 묵언수행하는 승려처럼 사람들은 말이 없다. 삶의 피로도가 한계 수치에 이른 것 같다. 잘 나가는 회사의 올해 성과급도 눈에 띄게 줄었다. 실적도 실적이겠지만 무엇보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탓이 크다. 올해를 빗댄 사자성어 ‘밀운불우(密雲不雨)’가 딱 들어맞는다.

 연말은 연말다워야 한다. 다소 들뜬 기분도 있고 기대감에 살아나는 소비도 연말의 필수요소다. 과소비를 질타하는 여론도 있어야 한다. 과소비 질타는 그만큼 소비심리가 살아났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올해 끝자락의 술자리는 쓴 소주잔이 고작이다. 소비의 ‘필수요소’ 따위는 사치다. 그저 빨리 병술년이 가고 정해년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올해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 주요인은 경제정책의 실패다. 고유가, 환율, 부동산과 맞서 싸운 뒤 오는 무력감이 사회 전체를 엄습하고 있다. 그것도 승전이 아닌 처절한 패배다. 패전 말미에 오는 ‘공황’은 무기력증을 유발했다. 독설의 화살은 언제나 정권에 꽂혔다. 패전의 멍에를 고스란히 뒤집어 쓴 국민은 분기탱천하다. 있는 자는 있는 자 대로, 없는 자는 대로 불만이다.

 올 한 해를 복기해 보자. 정부가 ‘강남 집값과의 전쟁’을 선언한 뒤 무차별 난사한 각종 정책은 모두 과녁을 빗나갔다. 유탄은 오히려 입안자의 발목을 옭아맸다. 차라리 아니 한만 못했다. ‘정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아직도 배고픈 한국 경제를 밥그릇부터 나눈 결과다. 전략의 실패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패인은 무엇보다 전쟁을 치를 장수를 구비하지 못한 탓이다. 전쟁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전략도 사람이 짜는 일이다. 명장의 가치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또 명장 밑에 명 참모가 있는 법이다. 을지문덕 장군이 수만의 군사로 수십만의 수나라 군사를 전멸시킨 것도 그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중간 장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도 목숨을 바쳐 명령을 따른 중간 장수 덕분에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명장의 리더십을 부인할 수 없지만 참모의 공과 또한 그에 못지 않다. 그래서 참모의 존재는 더욱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훌륭한 장수는 정부에도, 기업에도, 산업에도 필요하다. 정책입안자는 국민 모두가 이해할 있는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국민을 볼모로 한 정책은 목숨을 담보로 한 도박과 같다. 정책은 결코 ‘러시안 룰렛’이 아니다. 기업은 지속 가능한 성장전략을 짤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백년이 넘는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영자 밑에 전략가는 필수다. 산업 역시 국가경제를 받쳐줄 대표산업이 필요하다.

 한국경제의 대표 산업주자는 단연 IT다. 수출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IT코리아’로 불릴 만큼 융성했지만 정작 대표로 내걸 업체는 몇몇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기업이다. 반도체·휴대폰·LCD 할 것 없이 모두 명장이다. 그러나 중견·중소기업 중에서 산업의 중간 장수로 내걸 만한 업체는 없다. 허리를 지킬 중간 장수가 없는 셈이다. 뒤늦게 중견기업을 만들겠다고 정부가 나섰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명장 밑에 사람이 붙는 법이다. 산업계 명장은 수많은 고용을 창출한다. 명장의 우산 아래 실질적으로 고용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것은 중간 장수인 중견기업이다. 현 정권이 그토록 강조하는 고용창출이다. 정부나 산업 모두 중간 장수가 없다. 야전에서 ‘돌격 앞으로’를 외칠 장수가 없다는 것은 결코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병술년 패전의 복기는 좀 더 근원적이어야 한다. 지금 복기만 잘하면 내년 말에는 승전의 기분으로 과소비를 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경우기자@전자신문, kw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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