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준은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해 인류문명에 많은 영향을 끼쳐 왔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구미 선진국의 급격한 산업발전도 표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구미 선진국에 비해 약 200년이나 늦게 산업화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4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는 표준의 역할이 매우 컸다.
정부는 산업화 초창기인 1960년대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해 한국산업규격(KS)을 개발·보급함으로써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지원했고 1970년대에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을 설립, 국가 측정표준을 확립하고 측정기술을 지원함으로써 중화학 공업 발전의 기반을 조성한 바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1960년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1990년대에는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전환됐으며, 국민생활의 다양화·고급화가 실현되고 정보통신·반도체·자동차·조선 등 기술집약적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21세기 들어 경제의 글로벌화가 가속화하면서 우리나라 기업은 종래의 모방기술단계에서 탈피해 기술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모방기술 단계를 벗어나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표준의 관점에서 보면 참조표준의 개발과 활용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참조표준이란 국가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신뢰도가 공인된 자료를 말한다. 예컨대 속도나 만유인력 상수와 같은 과학기술 데이터부터 산업현장에서 활용되는 구리나 철의 열전도율, 한국인의 인체치수, 치열구조, 고혈압 기준과 같이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한 데이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자동차 제조사는 모방생산만으로는 국제 경쟁력을 갖출 수 없음을 인식하고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각종 소재의 물성데이터가 부족해 신제품의 독자개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장비의 설계 및 생산에 필수적인 플라즈마의 물성 데이터가 없어 미국에 매년 300만달러의 사용료를 내고 있는 형편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감안할 때 지난 1일 우리나라 국가참조표준개발 및 보급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참조표준센터가 설립된 것은 늦은 감은 있지만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국가참조표준센터가 설립됨으로써 그동안 방치됐던 데이터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국제기준에 따라 평가해 참조표준으로 등록 및 보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산업자원부는 지난 5월 ‘제2차 국가표준기본계획’의 주요 추진과제로 ‘국가참조표준 육성계획’을 확정했다. 육성계획은 국가참조표준의 수집·평가·등록 업무를 전담하는 국가참조표준센터를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설치하고 2010년까지 데이터 생산능력을 갖춘 연구기관·시험기관·대학 등 20개 기관을 데이터센터로 지정, 50개의 핵심분야(반도체·철강·자동차 등) 50개 참조표준 DB를 구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 올 연내 자료의 활용도가 높은 한국인 심장·혈관·반도체·플라즈마·자료 5개 분야의 참조표준을 우선 개발한다. 구축된 참조표준 DB의 폭넓은 보급을 위해 표준관련 홈페이지와 연계된 온라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한편 참조표준에 대한 홍보활동도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또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술개발 및 연구활동 과정에서 생성되는 유용한 참조데이터를 수집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참조표준의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독일 등과도 협력체계를 구축해 자료의 공유 및 공동 연구개발도 병행해 나가기로 했다. 표준의 중요한 핵인 참조표준 육성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인 지원의 첫 단추가 끼워진 셈이다. 육성전략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기초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연구소·대학들의 참여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의 눈치만 보며 자료를 얻어 오던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가 축적한 참조표준을 기반으로 선진국에 버금가는 원천기술을 확보해 세계시장을 선점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해 본다.
◇안현호 산업자원부 산업기술정책관 ahnhh@mocie.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