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은 폐쇄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데뷔작인 ‘가발’을 부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일상 속에 감춰진 폭력의 실체에 접근하고 있는 이 작품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우연히 길을 잃고 낯선 공간으로 들어선 이방인이, 이미 그 공간을 점령하고 있던 기존 구성원들의 소집단에게 린치를 당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수없이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원 감독이 직접 각본까지 쓴 이 영화는 한국 사회의 계층 간 갈등을 교묘하게 비틀어 삽입하고 있다. 유명한 성악가이자 대학교수 영선(이병준 분)은 임시번호판이 달려 있는 새로 산 흰색 벤츠를 몰고 대학 제자 인정(차예련 분)과 함께 드라이브를 즐긴다. 물론 그는 엉큼한 속셈을 갖고 있다. 도로 위에서 속도 위반으로 경찰(한석규 분)의 검문에 걸린 그는 경찰의 추격을 피해 샛길로 접어 들어 한적한 강변 백사장에 도착한다.
영화의 대부분은 백사장 위에서 전개된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서 있는 배산임수의 지형은, 손자병법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불퇴전의 각오로 싸울 때 등장하는 형세다. 낯선 곳으로 길을 잘못든 이방인들인 그들이 이곳의 토박이들과 만나면서 사건은 조금씩 복잡해진다. 토박이의 우두머리 격인 봉연(이문식 분)은 처음에 얼마나 순박한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실습을 빙자한 교수의 애정공세를 피하기 위해 혼자 산 속으로 도망친 인정은 오토바이를 몰고 오는 봉연을 만나 큰 길까지만 테워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봉연이 도착한 곳은 처음 도망친 그 강가 백사장. 교수의 벤츠는 백사장 모래에 바퀴가 빠져 꼼짝 못하고 갇혀 있고, 그 주위로 동네 청년들이 모여들고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한 봉연과 두 명의 마을 청년, 그리고 약간 정신이 혼미한 정신이상자(오달수 분)는 도시에서 온 두 남녀를 사이에 두고 삼겹살 파티를 벌인다. ‘구타유발자들’의 내러티브는 도시·시골, 지식인·서민의 계층간 대립을 바닥에 깔고 있다.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언행이 미묘한 파장을 불러 일으키며 서로의 가슴에 상채기를 내는 것은, 그들 사이에 근본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계층간 갈등 때문이다.
감독은 성적 코드를 양념으로 잘 섞어서 멋진 코믹잔혹극을 만들어냈다. 게으른 다혈질 경찰로 변신한 한석규도 괜찮지만 배우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이문식이다. 감독을 잘못 만나 공필두에서 쓸데없이 재능을 낭비한 이 뛰어난 배우는, 감정을 실은 눈빛 하나, 사소한 말투 하나가 얼마나 섬뜩한 파괴력을 갖고 전달되는지를 탁월한 연기력으로 보여준다. 그가 없었다면 ‘구타유발자들’이 의도하고 있는 일상 속의 숨은 폭력은 형상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폭력은,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들 스스로 그것이 폭력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데서 더 위협적이다. 가령 폭력을 업으로 하고 있는 조폭들이 휘두르는 칼이나 쇠파이프보다, 그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휘두르는 몽둥이가 훨씬 치명적이다. 도시문명에서 고립된 마을 청년들은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관객들은 착잡하다. 왜냐하면 폭력의 희생자들이 무작정 선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수는 위선적이며 여제자를 성적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제자는 순진하지만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녀는 마을 청년들이 왜 그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돼 있다. 무지 역시 또 하나의 폭력이다.
‘구타유발자들’은 고도 성장 산업사회를 경험한 한국 사회의 집단무의식 속에 잠복한 뿌리 깊은 계층적 갈등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갖고 있다. 아쉬운 것은 그것이 폭넓은 의미망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들이 이 영화에 보내는 지지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폐쇄공간에 벌어지는 다섯 시간 동안의 이야기 구조는 짜임새 있으며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다.
그 긴장감은, 우리들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우리 내부의 숨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 혹은 자신도 모르게 폭력에 길들여지거나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충동의 이율배반적 모순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기때문이다.
<영화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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