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봇은 그 태생부터가 상상력의 산물이다. 20세기 초 체코의 극작가 칼 차펙은 과학기술을 통한 노동해방을 꿈꾸며 로봇(Robot)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로봇은 이처럼 상상력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자동차, 비행기 등 필요에 의해 발명된 여타 문명의 이기와는 출발부터 달랐다. 이후 로봇기술의 발전사는 인간의 상상력을 한번도 뛰어넘지 못했고 앞선 로봇기술은 로봇에 열정을 갖고 꿈꾸던 국가만이 갖게 됐다. 말하자면 과학적 상상력은 로봇산업을 선도하는 견인차였던 것이다.
◇로봇강국, 그들의 원천기술은 상상력=미국, 일본 등 로봇강국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로봇에 대한 문화적 인프라가 튼튼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로봇왕국 일본이 자랑하는 첨단 로봇기술의 근원이 1950년대 데스카 오사무의 만화 아톰에 뿌리를 두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주를 나르며 악당을 물리치는 로봇소년 아톰의 모습은 당시 일본 어린이들의 가슴 속에 과학의 꿈을 심어줬다. 이후 마징거와 건담, 에반겔리온으로 이어진 로봇 애니메이션의 계보는 일본인들의 과학적 감수성을 끊임없이 자극했고 일본 과학계에 지금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이 지난 80년대 미국을 따돌리고 로봇왕국이 된 것도, 세계 최초의 이족보행로봇 ‘아시모’와 로봇강아지 ‘아이보’를 개발한 것도 재기발랄한 일본인들의 상상력을 빼고서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결국 어릴적 로봇만화에 심취한 마니아와 오타쿠들이 각자 속한 로봇연구소 등에서 자신의 꿈을 키운 것이다.
미국의 로봇기술도 할리우드의 풍부한 상상력을 밑거름으로 발전해왔다.
미·소간의 우주경쟁이 한창이던 지난 6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외계를 탐사하는 우주로봇을 소재로 한 SF영화들이 제작되어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 영화에서 묘사되던 우주로봇은 그저 재미있는 공상에 그치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은 화성 표면을 탐사하는 우주로봇을 보유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스타워즈의 R2D2나 터미네이터에서 등장한 전투로봇도 오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미군은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무인화된 로봇병기를 실전배치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TV외화 전격 Z작전에 나오던 로봇차량 ‘키트’도 지난해 무인 자동차 스탠리가 모하비 사막을 횡단하는데 성공함에 따라 사실상 실용화의 길에 들어섰다. 이제 미국인들은 영화 A.I와 아이로봇에 나왔던 지능적인 사이보그를 꿈꾸고 있다. 구글이나 애플에서 제작한 지능형 로봇이 인기상품으로 떠오를 시기도 얼마 남지 않은 느낌이다.
◇한국인의 로봇드림은 진공청소기?=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일류의 전자산업과 IT인프라에서 충분한 경쟁력에도 불구하고 차세대 로봇개발에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의 적극적 지원하에 로봇강국의 거창한 깃발을 내걸고 인간을 돕는 로봇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청소로봇, 안내로봇, 이족보행로봇 등 뻔한 아이템을 제외하면 도무지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로봇업계도 갈피를 못잡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LG전자,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도 새로운 로봇시장을 개척하기 보다는 시장이 성숙되기를 기다린다는 보신주의로 일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로봇청소기처럼 시장성이 검증된 극소수의 제품에 거의 모든 로봇업체가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소니, 혼다가 로봇산업에 꾸준한 열정을 갖고 아시모와 아이보 등 로봇사에 한 획을 그을 걸작 로봇을 만들어낸 것과 정말 비교되는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차세대 로봇산업을 키우는데 필요한 물질적 기반은 골고루 갖추고 있다. 로봇제조에 필요한 요소기술, 연구인력, 정부지원 등 뭐하나 빠질 것이 없다. 지금 한국 로봇산업의 가장 큰 취약점은 돈이나 기술력보다는 멋진 로봇세상을 만들겠다는 꿈과 열정이 경쟁국에 비해서 뒤처진다는 점이다.
로봇을 만들 능력은 있어도 아이디어가 부재한 현 상황을 타개하려면 로봇산업의 발전전략을 경제, 기술적 관점이 아닌 문화적 관점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컨버전스 시대에 히트를 칠 로봇제품은 뛰어난 과학기술과 상상력의 결합체라는 사실부터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대중들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해 한국적인 로봇문화를 발전시키고 이를 다양한 로봇 애플리케이션으로 연결한다는 거시적 안목의 로봇산업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류열풍에서 보듯이 우리 민족에게도 세계를 놀라게 할 상상력과 문화적 역량은 충분히 있다. 이제 막 날개를 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로봇산업에 상상력이라는 날개를 누가 달아줄 것인가.
*비전문가들 모여 로봇에 대해 얘기해보니
지난해 9월 30일 아침, 태평로 코리아나 호텔의 한 커피숍에서는 매우 이색적인 ‘로봇 전문가’ 회의가 열렸다. 만화가와 심리학 박사, 경영컨설턴트, 신문기자, 방송 PD, 교육 전문가. 로봇분야와 상관없는 ‘비전문가’들이 모여 차세대 로봇을 이용한 서비스시장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던 것이다.
이날 회의를 주최한 한국지능로봇산업협회의 신경철 회장은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지능형 로봇시장을 개척하면서 상상력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면서 “여러분야 전문가들의 아이디어를 로봇개발에 접목하기 위해 ‘URC로봇서비스연구회’란 모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참석자들의 다양한 배경 만큼이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가상로봇에서 노인을 위한 안마로봇까지 그동안 듣지 못했던 참신한 의견이 연이어 나오자 주최측은 크게 고무됐다. 로봇분야 문외한들이 주도하는 최초의 로봇포럼인 URC로봇서비스연구회는 연말까지 5번이나 더 개최됐다. 여기서 나온 차세대 로봇에 대한 아이디어의 상당수는 현실성이 없지만 일부는 관련업체에서 실용화를 검토하고 있다. 평소처럼 뻔한 로봇업계 선수끼리 모인 회의였다면 도저히 나오지 못할 귀중한 아이디어를 얻고 차세대 로봇에 대한 한국인의 시각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URC로봇연구회의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 로봇산업의 취약점인 ‘상상력과 아이디어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는 모델을 만든 것은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회의에 참여한 청주교대의 한정혜 교수는 “로봇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차세대 로봇 개발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면서 보다 다양한 사람에게 참여기회를 준다면 로봇산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지능로봇산업협회는 다음에는 문화콘텐츠 전문가를 주축으로 로봇포럼을 구성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공적인 로봇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기술력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에 우리나라 로봇업계도 조금씩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뷰>심상민 호서대 교수
“로봇이 꿈과 상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본다면 창의성을 북돋는 사회분위기 조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콘텐츠 전문가인 호서대 심상민 교수는 로봇을 산업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꿔야 국내 로봇업계가 블루오션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초·중·고교생에게 로봇에 대한 제대로 된 창의성 프로그램을 교육시킨다면 머지않아 우리나라 로봇산업은 강력한 성장엔진을 얻을 것입니다.” 로봇기술이 우리 사회에 미칠 방대한 영향력을 감안할 때 학생들에게 과학과 인간의 꿈이 도달할 수 있는 넓고 깊은 세계를 보여주는 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심교수는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국민적 관심을 끄는 화제작이 나오는 것도 대중적인 로봇문화를 활성화하는데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도 로봇태권브이라는 대중적 로봇콘텐츠가 있습니다. 최근 국산 게임,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주목할 로봇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데 이를 로봇산업과 체계적으로 연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는 한 나라가 보유한 로봇콘텐츠의 상상력과 스토리가 21세기 로봇산업의 중요한 경쟁요소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로봇의 개발단계에서 문화적 부가가치를 고려하고 스토리텔링과 함께 진행하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로봇캐릭터는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향후 한국산 로봇이 대장금처럼 주요한 한류상품이 될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요.”
심교수는 끝으로 요즘 유행하는 로봇스포츠대회도 싸움 잘하는 로봇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더 높이 평가하도록 바꾸자고 제안했다.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