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온 A씨. 겉옷만 벗어던지고 거실 소파에 앉는다. 오디오가 자동으로 켜지는 동시에 인터넷에서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악을 내려받아 틀어준다. 어디에선가 머리를 맑게 해준다는 로즈마리 향도 풍겨온다. 피로가 자연스럽게 풀린 A씨. 이제는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다.
장면 #2. 전날 피로가 풀린 덕에 아침 일찍 일어난 A씨. 오늘은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스포츠 시뮬레이터 앞에 선다. 자동 생체리듬 측정 시스템이 A씨에게 권장한 운동은 5Km 오르막길 걷기. 곧바로 눈 앞에 입체영상으로 낯익은 언덕길이 펼쳐지고 경사진 벨트 위를 걸으면서 실제 운동이 시작된다. 걷기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장면은 숲 속으로 바뀌고 상쾌한 솔잎 향과 함께 마무리 운동을 한다.
아직은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장면들. 바로 문화기술(CT)이 꿈꾸는 미래다. 특히, 인간의 감성과 뇌파를 활용해 상태를 측정하고 오감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이른바 감성형 문화콘텐츠기술은 전 세계적으로도 개발 경쟁이 뜨거운 분야다.
◇해외 연구 사례=미국 카네기멜론대학 엔터테인먼트기술연구소(ETC)의 ‘인식증폭(Augmented Cognition)’ 프로젝트는 뇌파를 통해 TV와 같은 외부 기기를 제어하는 실험이다. 사용자의 기분을 분석한 후에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브레인TV’나 뇌파로 조종하는 미니 자동차가 대표적인 애플리케이션이다.
미디어 랩 유럽은 뇌파 검진기를 통해 얻는 데이터를 게임 제어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것도 건강과 장수를 테마로 하는 웰빙 게임의 등장이다. 즉 뇌파 측정을 통해 마음이 안정되면 안정될수록 게임의 캐릭터 제어가 원활해지는 식이다. ‘놀이’의 고전적 정의인 현기증과는 상반되지만 이러한 게임을 통해 마음의 평온이라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신체가 만들어 내는 신호중 가장 손쉽게 채집할 수 있는 피부의 근전계(EMG·Electromyograph)를 통해 하드웨어를 직접 제어 하는 EMG 행동인식(Gesture Recognition) 기술도 다양한 연구기관에서 개발되고 있다. 다양한 동작을 취할 때 발생하는 근전도를 미리 설정한 후, 팔에 감겨있는 근전계 밴드를 통해 신호를 채집하면 신체 움직임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일도 가능하다.
◇국내외 기술격차 미비=이처럼 해외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지만 기술격차는 그다지 크지 않다는 분석이다. 물론 국내에서 그동안 체온 등 단일 지표를 이용한 응용 시스템 개발은 시도됐지만 종합적인 시스템으로 기술 개발이 추진된 실적은 없다. 또 감성공학, 인간공학 분야에서 생리적 지표 분석을 통한 인간 정서 상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를 자동화하는 솔루션 개발은 아직 멀었다.
하지만 국내·외를 망라해 생리적 감성 지표가 접목된 게임이나 시뮬레이터 제품은 아직 발표된 바가 없으며 관련 IT 인프라가 충분한 국내의 경쟁력은 나쁘지 않다는 분석이다.
현재 일본은 감성과학회를 중심으로 츠쿠바 대학, 신주대학, 문화대학 등에서 관련 분야를 활발히 연구중이다. 특히 츠쿠바 대학 예술공학과의 하라다 교수팀은 인간의 생리적 지표를 이용해 감성을 판단하고 이를 토대로 2004년 말부터 스마트 액자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통합 학제적 연구가 핵심=전문가들은 감성형 문화콘텐츠기술을 개발하는데 있어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이나 기술의 개발보다는 인지과학·감성과학·컴퓨터 공학·디자인 분야의 지식과 기술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통합 학제적 연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는 감성형 문화콘텐츠기술뿐 아니라 CT 전분야에 해당하는 원칙이다. CT가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설계·제작·가공·유통·서비스하는데 필요한 이공학·인문사회학·디자인·예술 등 관련분야를 망라하는 지식과 기술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종 학계 모임의 장을 빨리 마련하고 의견을 모으는 것만이 세계 수준에 좀 더 가까이 가는 길이다.
■CT육성 정부가 `앞장`
지난해 8월 정부는 제18회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열고 ‘미래 국가유망기술 21’을 선정했다. 나노·고기능성 소재기술, 인지과학·로봇기술 등 일반적인 차세대 기술들이 대거 뽑힌 가운데 14번째로 감성형 문화콘텐츠기술이라는 다소 생소한 항목이 등장했다.
감성형 문화콘텐츠기술은 인간의 오감(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과 감성, 뇌파 등을 연계해 게임·디지털영상·가상현실 등 문화콘텐츠의 직감적이고 효과적인 전달에 활용한다는 CT의 중요한 기반기술이다. 범정부 차원에서 CT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2015년 글로벌 톱10 국가 진입을 위한 21대 과제의 하나로 선정한 것이다.
정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감성형 멀티미디어콘텐츠를 개발해 교육·문화·레저 등 일상생활의 편의성을 증대시킨다는 목표다. 현재 감성형 문화콘텐츠기술 발전을 위한 태스크포스가 구성돼 구체적 실행계획을 만들고 있으며 조만간 ‘미래 국가유망기술 21의 실현을 위한 미래 국가유망기술 개발 종합계획’이 마련되면 본격 투자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세부기술은 △인간의 체험적·심미적 감성 측정·분석기술 △3차원 입체영상 기술 △디지털 미각·후각 기술 △뇌파분석 기술 △정서상태 판단 기술 등이 있으며 나노기술을 활용한 손톱 크기 입체 디스플레이나 두루마리 디스플레이도 관련 분야다. 인간 오감 인식을 디지털콘텐츠와 연계표현하기 위해 공학·의학·인문학 등 융합영역 기술의 동반 발전도 기대된다.
문화산업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도 ‘CT 로드맵’을 앞세워 CT 육성에 나섰다. 산·학·연 전문가 55명의 CT 비전위원회가 도출한 ‘CT 로드맵’은 △공통기반기술(창작기술·표현기술·유통 및 서비스기술) △산업장르별 콘텐츠제작기술(애니메이션·영화·게임·방송·음악·출판) △공공기술(문화유산기술·문화복지기술) 등 3개 부문 11개 분야로 이루어졌다.
사용자가 간단한 줄거리를 입력하면 이야기를 자동으로 생성해주는 자동 스토리텔링 기술이 대표적인 창작기술이며 표현기술은 ‘미래 국가유망기술 21’로 선정된 감성형 문화콘텐츠기술과 거의 동일하다. 유통 및 서비스기술은 다양한 콘텐츠를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체계를 갖추는 분야이며 콘텐츠제작기술 분야에서는 3D 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이나 하이브리드 게임서버 기술 등 각 장르별로 콘텐츠 제작과 배포에 필요한 기술들을 개발한다.
박위진 문화부 콘텐츠진흥과장은 “기술 패러다임이 ‘먹고사는 기술’에서 ‘즐기는 기술’로 변하고 있다”며 “디지털TV·디스플레이·차세대 이동통신 등 10대 차세대성장동력산업 대부분의 성패가 콘텐츠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세계 각국의 CT 개념
문화기술(CT)는 아직 우리 자신에게도 생소한 용어다. 그렇다면 해외 문화산업 선진국들은 우리 CT에 해당하는 개념을 어떤 용어로 부르고 있을까. 명확하게 정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나라마다 많이 쓰이는 용어는 있다.
우선 미국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엔터테인먼트 강국답게 문화산업의 오락적 요소를 강조하며 ‘엔터테인먼트 테크놀로지(Entertainment Technology)’라 부른다. 카네기멜론대 엔터테인먼트기술센터(ETC)에서는 관련 분야 석사 과정을 운영중이기도 하다.
문화산업을 창조산업(Creative Industry)이라 부르는 영국에서는 이의 연장선상에서 ‘창조기술(Creative Technology)’이라는 말을 종종 쓰지만 ‘디지털미디어&커뮤니케이션’처럼 특정한 기술 분야를 섞어 쓰는 경우가 더 많다. 일본에는 우리와 비슷한 ‘콘텐츠 테크놀로지’라는 용어가 있다. 그러나 엔터테인먼트 컴퓨팅이라는 용어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미국의 경우 엔터테인먼트 기술개발이 대부분 민간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유럽은 정부의 참여와 민간의 주도가 어느 정도 어우러진다. 일본 정부는 유럽보다 좀 더 적극적이다.
정진영기자@전자신문, jy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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