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예술이 부딪치는 곳에서 배어나오는 깊은 아픔이 김태웅 원작 연출의 연극 ‘이’에는 있었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에는 대학로 원작 연극이 갖고 있던 정치적 함유가 많이 희석되어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깊이가 모자란 연출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작이 갖고 있는 빼어난 아름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연극 ‘이’로 2000년 초연 이후 장기간 공연되고 있는 이 영화의 원작은, 연산군 시절을 배경으로 최고 권력자 왕과, 최하 계층이었던 광대의 만남을 통하여 권력과 예술적 자유의지에 대한 강렬한 풍자를 시도하고 있다.
‘왕의 남자’라는 제목에서는 동성애를 상품화 한 흔적이 배어나온다.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조선조 임금이 신하를 높여 부르는 ‘이’라는 단어가 갖는 정치적 은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 이것이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조 최대의 화두였던 왕권과 신권의 부딪침에서 파생되는 개인과 집단의 문제나, 권력을 둘러싼 궁중의 음모와 배신, 복수와 애증을 다루는 주제가 깊은 울림을 안겨 준다.
남사당 광대패의 장생(감우성 분)은 자신의 동료 공길(이준기 분)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와 기존 패거리들을 흡수하여 광대 조직을 이끌게 된다. 그가 낸 아이디어는, 왕을 풍자하자는 것이다. 임금 연산(정진영 분)과 그의 애첩인 기생 출신의 녹수(강성연 분) 이야기를 마당놀이로 꾸며 질펀하게 놀던 중,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신하 처선(장항선 분)의 명령으로 광대들은 의금부에 체포된다.
그러나 장생은 임금을 웃겨 보겠다고, 임금 앞에서 공연을 개최해 달라고 부탁한다. 드디어 연산과 녹수가 보는 앞에서, 왕의 문란한 성생활을 풍자한 광대놀이가 한 판 벌어지는데, 연산은 자신을 풍자한 연극을 보고 오히려 웃음을 터트리며 광대들을 궁중 내에 머무르게 한다.
광대 집단이 펼치는 연극을 통해 신하들의 도전을 잠재우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임금의 욕망은 점점 확대되어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죽게 한 선왕의 후궁들과 대왕대비, 그에 동조한 신하들을 처형하기 위한 수단으로 광대 집단들을 이용한다. 그리고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공길에게 임금은 관심을 보인다.
연산 시절은 많은 영화나 연극에서 수없이 반복적으로 다루어졌지만, 연극 ‘이’나 이것을 원작으로 한 ‘왕의 남자’는 연산과 광대 이야기라는 독특한 소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적 풍자, 그리고 궁중 권력·광대 집단이라는 이질적 요소를 부딪침으로써 파생되는, 예술과 인간 자유의지에 대한 갈구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이준익 연출의 ‘왕의 남자’는 정치권력에 대한 심도 있는 안목이 부족하다. 단지 연산이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광대 집단을 이용하는 것 정도에 그친다. 그 내부의 섬세한 갈등을 드러내는 힘은 미약하고, 깊이 없는 연출의 시각으로 각 인물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욕망과 애증은 입체적으로 형상화되지 못한다. 지나치게 클로즈업 위주로 잡은 인물 컷들은 그들이 놓여 있는 전체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바라보게 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왕의 남자’에서는 광대로 변신한 감우성의 질펀한 연기, 내적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복잡한 캐릭터 연산의 정진영, 그리고 공길 역의 이준기나 장항선 윤주상 등 조연들이 빚어내는 화음이 연출의 좁은 시야를 넘어서게 한다. 최고의 소재, 우수한 연기, 평범한 연출이 ‘왕의 남자’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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