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톨레랑스

 프랑스인의 국민성을 얘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말 중 하나가 ‘톨레랑스(tolerance)’다. 톨레랑스는 문화 다양성과 개인 인식의 차이를 용인해 주고 존중해 주는 경향이나 의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굳이 우리 말로 옮긴다면 ’관용’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동양적인 의미에서 관용이란 말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최근 프랑스 외곽 빈민촌에서 발생한 이주민들의 소요사태는 프랑스의 자랑거리인 톨레랑스 문화에 결정적인 흠집을 남겼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이슬람권 빈곤층 이민자들이 프랑스 본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채 빈곤을 대물림하는 사회 현상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한꺼번에 분출했다는 것이다. 빈곤층 이민자들은 주택가를 돌며 방화를 일삼고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기득권층과 권위의식에 도전했다. 결국 소요 사태는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진정됐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프랑스는 자신들의 상황을 새롭게 인식했을 것이다.

 이번 소요 사태는 프랑스라는 선진 사회가 ‘톨레랑스’라는 외피로 위장하고 있지만 해소될 수 없는 사회적 간극과 적대감을 뿌리 깊이 간직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소요가 끝나고 프랑스 정부가 내놓은 정책은 불법 이민자 규제를 강화하고 해외 유학생들의 프랑스 입국을 제한하는 것에 그쳤다. 프랑스인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켜줬던 ‘톨레랑스’의 문화가 이민자들의 원초적 욕구 앞에 두 손을 들어버린 셈이다.

 차원은 다르지만 이번 황우석 교수의 윤리 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우리 사회의 대처 능력에서 ‘톨레랑스의 실종’을 본다면 과장일까. 굳이 톨레랑스라는 외래어를 빌릴 것도 없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관용이나 중용의 미덕이라는 게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논쟁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고 개입해 온 당사자들이 한치의 공간도 허용하지 않고 상대방을 압박한다. ‘도 아니면 모’식이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거침없는 비판과 비방이 난무한다.

 최근의 사태를 보면서 이견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용인과 어느 정도의 배려가 필요한 것 아닌지 자문해 본다.

장길수 경제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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